소각 압박·규제에 막힌 SK…숨통 틔우려 ‘해외 증서’로 눈 돌린다
SK하이닉스, 10조 규모 자사주 활용 美 ADR 상장 검토자사주 소각 의무화 담긴 ‘상법 개정안’ 표류…국외 자금 조달로 시간 벌기[대한경제=심화영 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계류되는 사이, 재계가 자사주를 전략적 자산으로 보존하기 위한 국외 탈출(엑소더스)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자사주가 법적으로 강제 소각돼 사라지기 전에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 등을 통해 대규모 투자 재원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겠다는 경영권 및 재무 방어 시나리오가 가동된 것이다.가장 먼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곳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보유 중인 자사주 약 2.4%를 활용한 미국 ADR 상장 가능성에 대해 “검토 중”이라고 공식화했다. 해당 자사주의 가치는 시가 기준 약 10조원에 달한다.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주주 환원을 넘어선 절박한 생존 전략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600조원, 청주 공장에 40조원 등 연간 약 30조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설비투자를 집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상법 개정안이 통과돼 자사주를 취득 1년 내에 소각해야 하는 규제가 현실화되면 10조원에 달하는 재무적 유연성을 고스란히 상실하게 된다.결국 SK하이닉스의 ADR 검토는 법 개정 이전에 자사주를 유동화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로 인식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TSMC나 ASML 등이 ADR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높은 밸류에이션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도 SK하이닉스가 해외 상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주요 배경 중 하나다.과거 글로벌 금융 위기나 국내 규제 환경 변화 시기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ADR을 주요한 자금 조달 창구로 활용해 왔다. 포스코는 1994년 뉴욕증시를 시작으로 런던과 도쿄 등 글로벌 교차 상장을 통해 국내 기업 중 가장 선진적인 해외 예탁증서 모델을 구축한 바 있다.LG디스플레이 역시 2004년 뉴욕증시 상장을 통해 약 10억 달러의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며 적기 투자 재원을 확보했던 성공 사례가 있다. SK텔레콤과 KT 등 통신사들 또한 외국인 지분 제한 규제를 우회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꾸준히 ADR을 활용해 왔다. 현재 자사주 소각 위기에 직면한 다른 대기업들이 다시금 이 모델을 주목하는 이유다.하지만 기업들의 이러한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정치권에서는 자사주를 원주로 전환해 ADR을 발행하는 것을 상법 개정안의 취지를 훼손하는 ‘제3자 처분 행위’로 규정하고 추가적인 규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 회피 목적의 자사주 활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다.이에 따라 재계의 시선은 이미 ADR 단계를 넘어 그 다음 수단으로 향하고 있다. 자사주와 무관한 신주 발행 기반의 해외 직접 상장을 추진하거나, 해외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글로벌 자본을 직접 유치하는 방안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되는 분위기다.대기업 관계자는 “단순히 ADR이 막히는 것보다 기업의 정당한 경영 판단과 자금 조달 수단까지 모두 회피로 규정되는 상황이 더 큰 위기”라고 토로했다. 아울러 투자 재원 확보가 불투명해지는 순간 국내에서의 대규모 투자 계획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