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속의 아까시꽃이 코끝을 자극한다. 그 향기에 취하다 보니 하얀 꽃잎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순백의 영혼처럼 다가온다. 어렴풋이 연정을 느끼는 소녀 모습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루지 못한 뜻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가 바로 저런 빛일까 싶어 알 듯 모를 듯한 신열에 휩싸인다.
초여름의 아까시꽃은 어딜 가나 흔하지만, 내게는 유독 설움의 색채로 안겨드는 꽃이기도 하다. 사춘기 시절 이따금 아까시나무가 무성한 자갈밭 귀퉁이에 서서, 등하굣길의 동갑내기 친구를 훔쳐본 일이 있다. 아까시숲 사이로 바라본 친구 모습은 걸음걸이에까지 힘이 실려 있었다. 교복 치맛자락을 나풀대며 내딛는 얌전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던 걸음걸이는, 내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앓이를 하였다. 어쩌다 내 의중을 알아차리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비밀스런 것을 들켰다는 낭패감에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 무렵에 피어나던 아까시꽃은 빳빳하게 풀 먹여 다린 여학생의 교복이었고, 또 내 안에 가무려둔 꿈의 빛깔이었다. 그 희디 흰 웃옷 속에는 온갖 꿈으로 부풀던 여학생들의 세계가 있었고, 망울망울 터져 향기로운 꽃그늘 아래에는 학업에 대하여 막막해하던 내가 있었다. 녹음 속에 흐드러진 하얀 꽃잎처럼 거침없이 피어나고 싶었을 때, 고통이 배가되었다. 어찌 보면 희망과 절망이 아까시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시기의 아까시꽃에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던 내 꿈이 얹혀져 있었다.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추구할 때는 거기에 비례되는 아픔이 따라, 그런 것을 비유해 ‘산고(産苦)’라 하는 것 같다. 내가 문단에 뜻을 두고 작품 응모를 하던 시기도 주로 아까시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언젠가는 원고 마감일이 큰아이 생일과 맞물린 일이 있는데, 심사에서 떨어지고 나면 어린 아들의 생일 미역국이 맘에 걸리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진통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난날의 어려움은 나로 하여금 보다 성숙의 길로 이끄는 모태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 살며 경험하게 되는 진통은 이미 어떤 일이 시작되었다는 징조가 아닐까.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의식의 추구 없이는 생성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산모가 새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배앓이를 하듯, 새로운 일을 모색함에 있어 겪게 되는 진통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다.
김선화(수필가)
〈건설을 보는 눈 경제를 읽는 힘 건설경제-무단전재 및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