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m인 정육면체 콘크리트구조물을 만드는 공사가 발주되었습니다. 응찰자들에게는 입찰용 내역서(단가 항목만 비워 둔 내역서)가 배부됩니다. 발주처가 납품 받을 최종인도물은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발주처는 자상하게도 공사가 끝나면 치워야 하는 거푸집까지 구조물 부위별로 공종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 거푸집의 재료, 사용 횟수, 품 등은 건설표준품셈에 자세히 지정(specify)되어 있기 때문에, 응찰자는 단가만 적어 넣으면 됩니다. 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반영한 실제 원가를 넣었다가는 부적정한 단가로 판정되어 수주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거푸집 기술은 판재에서 합판, 표면처리 합판, 시스템 폼 등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표준품셈 제도에서는 그 발전 속도를 제때 맞추기가 불가능합니다. 감사기관에서는 4회 사용으로 지정된 거푸집을 5회 쓰면 감액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에서는 단순한 예를 들었지만, 아무리 크고 복잡한 공사라도 내역서는 작업분류체계에 따라 작성됩니다. 분류된 각 단위공종별 물량에 단가를 곱한 것이 그 공종의 원가가 되고 이들의 합이 전체공사의 직접원가가 됩니다. 간접공사비, 제경비 등은 직접원가를 기초로 해서 정부가 지정한 요율대로 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응찰자의 재량권은 10% 이내에서 이윤을 정하는 것뿐입니다.
‘표준’이란 것은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지금 시행하고 있는 입찰 제도는 현장 여건이나 건설회사들의 창의성과 기술력을 투찰금액에 반영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큰 건설회사들은 입찰 내역서와 별도로 현장실행 예산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입찰용 원가는 전체 응찰회사가 거의 비슷한 금액을 써 낼 수밖에 없지만, 회사에서 실제 현장용으로 작성하는 실행예산서의 원가는 회사마다 다릅니다. 하도급회사의 견적을 받아 그대로 넣는 경우도 있고, 경험이 많은 회사들은 자기들의 과거 실적치를 반영한 예산서를 만듭니다.
공공토목공사에서 항만공사와 지하철 공사의 현장실행 원가율은 다르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즉 공사 유형별로 정부가 추정하는 공사원가가 실제와 다르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발주처가 산출한 추정금액이 실제 원가에 근거한다는 대전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정부는 그간 업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간곡하게 요구하던 ‘제값 주고 제값 받기’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임단가, 표준시장단가, 제경비, 간접비, 낙찰률 현실화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입찰 제도는 발주처가 추정하는 직접공사 원가가 현장의 실제 원가를 제대로 반영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게 안 맞으면 그 뒤에 따르는 항목들의 금액도 다 실제 원가가 아니게 됩니다.
‘상세하게 지정할수록 발주자에게 불리하다’는 것이 계약 관리의 기본입니다. 글로벌 시장의 발주자들은 공사수행 방법은 건설회사(Contractor)에 맡기고 계약의 목적, 즉 최종 인계물의 품질과 공기에 대한 책임은 엄하게 묻는다는 단순 명료한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해외공사 입찰견적을 해 본 기술인들은 국내 시장에도 이 원칙을 도입해 달라고 계속 주장해 왔습니다.
한국에는 1만3000개의 일반건설회사가 있습니다. 입찰금액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제도에서는 입찰서 작성에 필요한 직원만 필요할 뿐이지만, 정작 현장 원가는 입찰 전 짚어볼 필요도 없는 이상한 입찰 제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공공공사의 ‘제값 주고 제값 받기’ 논의가 추정금액 올리기에만 집중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거푸집의 사용 횟수까지 지정해 주면 견적 능력이 부족한 회사들에는 입찰 기회가 많이 주어지겠지만 기술은 설 땅이 없어집니다. 추정금액의 몇 퍼센트로 따면 얼마가 남는다는 개념만으로 경영하는 건설회사들에는 순수내역입찰제 시행이 껄끄러울 겁니다.
발주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부터 시범 적용하려던 순수내역입찰 제도가 현재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우리 입찰 제도의 실상이 보입니다. 이들이 다 입찰서 평가 능력이나 계약 관리를 수행할 능력을 갖지 못한 현실에서 당장 모두 순수내역입찰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리더그룹 회사들에는 순수내역입찰을 시행해야 합니다. 제 말이 섭섭하게 들리는 건설회사 오너들도 많으시겠지만 해외공사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제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정부에서는 건설시장에서의 갑질 청산, 특히 공공발주자의 갑질을 청산하기 위한 시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발주자나 계약자 모두 계약 관리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발주처 갑질 청산을 가장 확실하게, 즉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은 공공발주자도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게 하면 됩니다.
이순병(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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