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관한 공식적인 논의는 1990년 법무부에 민사특별법제정 분과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시작했고, 분야별로 소비자 보호, 언론 피해 구제 및 차별 행위 분야에서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의 논의가 지속돼 왔다.
그러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실제로 입법화된 분야는 하도급 거래 분야다. 지난 2011년 제18대 국회서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에 처음으로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기술을 탈취ㆍ유용하는 행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28일 국회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 행위에 기술 유용 행위뿐만 아니라 부당한 하도급 대금의 결정,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한 반품 행위, 하도급 대금의 부당한 단가 인하에 대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하도록 ‘하도급법’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하도급법’에서 최근에 도입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문제점을 △영미법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계약 분야에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되고 △징벌적 손해배상은 피고의 불법 행위가 은밀성(covert nature)을 갖고,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는 불법 행위가 대부분 원고 이외의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 적용된다는 점 등에 주목해 분석했다.
△영미법에서의 징벌적 손해배상
영미법의 ‘코먼 로’(Common law)에서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은 손해배상제도의 하나의 변칙(變則) 또는 이상(異狀, Anomaly)으로 특징진다. 민사법(civil law)에서 일반적인 손해배상(보상적 손해배상)은 피고가 원고에게 야기한 손해에 대해서 피고가 원고에게 보상하는 제도이지만, 보상적 손해배상은 피고가 행한 잘못된 행위의 성격(nature of wrongful conduct)에 초점을 맞추고, 손해배상액은 피고의 손해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할 것인지의 여부, 즉 행위 요건은 행위의 특징(nature of conduct)과 행위자의 마음 상태(state of mind)를 판단해 결정하므로, 일반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은 일반적인 불법 행위 요건보다 가중된(aggravated) 행위 또는 포악한(outrageous) 행위에 대해서 부과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영미법의 ‘코먼 로’에서 인정되고, 미국의 연방 성문법인 ‘독점금지법’에서 규정한 법리이다. 대륙법 체계로 운용되고 있는 독일이나 일본은 일반적인 불법 행위나 공정거래법상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륙법은 민사법과 형사법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체계를 취하고 있어 민사법에서 나타나는 손해배상에 형사법적 특징인 징벌 성격을 갖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대륙법 체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먼 로’의 징벌적 손해배상은 불법행위법(tort law)에서 적용되고 계약법(contract law)에서는 원칙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데, 현재 미국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은 개인의 건강과 안전(health and safety)을 위협하는 불법 행위에 주로 적용되고 있다. 주로 적용되는 분야는 타인을 해할 목적으로 타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고의적 불법 행위’(intentional tort), 제조물 책임(product liability), 건축물 책임(premise liability), 의료 과오(medical practice)의 불법 행위 분야에 주로 적용되고 있다.
계약 관계에서 불법 행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계약상 의무 불이행 이외에 독립된 불법 행위가 있어야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계약 분야는 결혼 계약 위반, 공공 서비스 제공 기관에 의한 계약 위반, 수탁인의 의무를 위반하는 계약 위반, 신의성실 조항 위반인 보험 계약과 고용 계약 분야다.
미연방 법무부의 사법 통계를 보더라도 계약 관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은 경우는 사기(fraud)와 같은 불법 행위 요소가 있는 경우와 고용 계약에서의 피고용인을 차별한 경우,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면서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판매한 경우 등이 대부분이다.
기업 행위와 관련해서는 영업 방해, 고용주의 고용 차별, 보험 계약과 관련한 보험회사의 사기, 명예 훼손, 지적재산권 침해, 영업 비밀 남용, 독점 금지 위반 행위와 같은 분야에 주로 적용되고, 하도급 계약과 같이 기업간 제품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계약에 적용된 사례는 찾을 수 없다.
미국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적법 절차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위헌 논쟁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일부 주에서는 주 대법원 판례나 성문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루이지애나주ㆍ네브래스카주ㆍ워싱톤주ㆍ매사추세츠주 등에서는 주 대법(State Supreme Court)이 판례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폐지했고, 뉴햄프셔주는 1986년 법률로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폐지한 바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이론적 정당성
미국의 ‘코먼 로’상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독점금지법’의 3배 배상제도는 손해 배상액이 실제 손해액보다 많게 책정되어야 하는 이론적인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독점금지법’의 3배 배상제도의 경우, 카르텔의 가격 담합과 같은 행위는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는 특성(Covert nature)이 있고, 원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가격 담합 행위로 인한 부당 이득을 완전히 몰수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원고가 입은 손해보다 많은 배상액을 가해자(피고)에게 배상토록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코먼 로’상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요건으로 은밀성(Covert nature) 또는 원고 이외의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결정하는 첫 번째 요소인 비난의 정도(Degree of reprehensibility)를 판단할 경우, 사회 전체에 미친 손해를 고려하고 있다. 특히, 뉴욕주는 원고가 계약 불이행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독립적인 불법 행위를 원고가 주장하고 증명하는 것 이외에 피고의 유사한 행위가 일반 대중에게도 행해졌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일반적인 불법 행위보다 가중된(aggravated) 행위 또는 포악한 행위이어야 부과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범죄에서 발견되는 포악성과 유사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하도급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의 문제점
우리나라 ‘하도급법’에서는 부당한 하도급 대금의 결정 행위,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한 반품 행위, 하도급 대금의 부당한 단가 인하 및 기술 유용 행위에 대해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고 있고, 입증 책임은 피고에게 부과한다.
현행 ‘하도급법’은 부당한 방법에 의하여 통상 지급되는 대가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한 경우는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계약금액 결정은 당사자간의 자유로운 협의에 의하여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수급사업자와 합의하여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코먼 로’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은 일반적인 불법 행위의 요건보다 가중된(aggravated) 행위에 대해서 부과하는데, 하도급 계약에서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합의하여 금액을 결정한 경우, 하도급 금액이 통상의 가격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일지라도 이러한 행위가 가중된 불법 행위라고 볼 여지가 없다.
또한 ‘독점금지법’의 3배 배상제도의 취지로 보더라도 계약금액 결정은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 행위로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하도급 거래에서 계약금액 결정 행위는 그 행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원고 이외의 사회 구성원에게 피해를 미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행 ‘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정당한 사유를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 하도급 금액을 감액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고, 부당한 감액의 예시를 하고 있다. 원사업자가 결정된 금액을 감액하면서 수급사업자와 합의한 경우에는 이것 또한 계약금액 결정의 일환으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사항이다. 그리고 수급사업자가 합의하지 않은 채로 감액한 경우에는 계약 위반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되지, 이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커먼 로’(Common law)에서 인정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연방 성문법(Federal Statute)인 ‘독점금지법’(Antitrust law)에서 규정하고 있는 3배 배상제도(Rule of treble damage)가 있는데, 이들 제도는 단순히 불법 행위를 억제하기 위하여 손해 배상액을 피고(가해자)가 원고(피해자)에게 입힌 손해 배상액보다 많이 배상토록 하는 제도가 아니고, 손해 배상액을 피해액보다 많이 부과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있다.
최근 ‘하도급법’에 도입한 원사업자의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 부당 단가 인하, 부당 발주 취소 및 부당 반품은 피해자에게 입힌 손해 이외에 제3자에게 손해를 입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고, 원사업자의 행위가 은밀하게 이루어져 수급사업자가 인지 못하는 행위도 아니기 때문에, 손해 배상액을 실제 손해액보다 많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책정할 이유가 없다.
단지 원사업자의 기술 유용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이고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악의적인 행위이므로 사기ㆍ기만의 정도가 심한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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