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에서 고액권의 심각한 부작용이 계속 지적되면서 폐기 움직임이 속속 일어나고 있다. 고액권이 탈세와 금융범죄, 테러자금 등에 악용되는 추세가 확대되는 반면 전자결제 확산으로 현금거래는 줄어드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는 셈이다.
인도 정부가 지난달 초 ‘검은돈’을 근절한다며 일부 고액권을 전격적으로 퇴출한 데 이어 호주 연방정부도 고액권의 폐기를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호주 정부는 지하경제가 확대되고 과세에도 큰 구멍이 나는 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보고 ‘지하경제 태스크포스’를 구성, 최고액권인 100호주달러(8만7000원) 지폐 폐지 등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호주 언론이 14일 보도했다.
태스크포스에는 국세청·호주중앙은행(RBA)·호주증권투자위원회 등 관계 기관이 참여하며,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 KPMG 회장 출신의 마이클 앤드루가 태스크포스를 이끈다.
호주 세입·금융서비스부의 켈리 오드와이어 장관은 “100호주달러 지폐의 유통 규모는 5호주달러 지폐의 3배에 이르고, 전자결제가 계속 늘고 있지만 100호주달러 지폐의 유통 규모는 약 300억호주달러(26조2000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오드와이어 장관은 “현금 사용 그 자체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사람들이 관련 거래를 신고하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며 100호주달러 지폐의 폐기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현재 호주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1.5% 규모인 210억호주달러(18조300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호주에서는 지난 2012년 당시 호주중앙은행 관리이던 피터 메이어가 상사인 글렌 스티븐스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50호주달러 지폐나 100호주달러 지폐는 탈세를 용이하게 한다며 폐지를 요구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올해 초에도 100호주달러 지폐는 50호주달러에 이어 발행량이 많지만, 시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범죄자나 탈세 기도자들의 비축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앞서 인도 정부는 지난달 초 ‘검은돈’을 근절한다며 고액권을 예고 없이 사용 중단시키고 신권으로 교체하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인도 정부는 당시 기존의 500루피(8650원)와 1000루피 지폐 사용을 중단하기로 하는 대신 500루피 지폐는 도안을 바꿔, 2000루피(3만5000원) 지폐는 새로 발행하기로 했다.
싱가포르도 2014년 당시 세계 최고액권 중 하나인 1만 싱가포르달러권(818만원)의 퇴출을 결정한 바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테러나 범죄 등에 이용될 가능성 탓에 고액권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계속되고 있다.
올해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한 보고서는 은행거래 회피 목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지폐로 100미국달러(11만6500원), 500유로(62만원), 1000스위스프랑(115만원), 50파운드(7만4000원)를 꼽고 폐기를 권고했다.
전자 지불 방식이 느는 만큼 고액권을 없애더라도 합법적 비즈니스는 거의 영향이 없는 대신 탈세나 범죄, 테러, 부패에 악용되는 것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게 보고서의 주장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올해 초 500유로 지폐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도 미화 100달러의 발행을 유예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대형 은행들인 HSBC와 UBS도 금융범죄를 막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필요하다며 고액권의 폐기를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