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위태위태! 복공판
<중> 성능기준이 부른 참사
파손된 콘크리트 복공판 더미. 안윤수기자 ays77@ |
일정 성능 기준만 충족하면 규격·자재 등 따지지 않아
하부 강판 두께 줄이거나 불량 중국산 수입 확산 우려
서울시 도시철도계획을 총괄하는 K부장(56). 그는 지난 2007년 기존 제품보다 덜 미끄럽고, 철강재를 30% 덜 쓰는 ‘미끄럼 방지용 복공판(콘크리트 복공판)’을 개발했다. 이 기술을 서울지하철 9호선 건설현장에 적용해 연간 40억원의 예산을 아꼈다. 공무원의 ‘직무발명’으로 인정받아 특허권 판매 수익까지 올렸다. ‘철밥통을 깬 공무원’, ‘서울시 기술직 첫 억대 연봉자’로 주목받은 덕분에 이듬해 토목 6급에서 5급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남들보다 진급이 4년 빨랐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미담(美談)’이다. 하지만 후일담(後日談)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콘크리트 복공판 특허를 인수한 민간업체는 잦은 파손과 하자로 재고가 쌓여 결국 부도처리됐다. 이후에도 콘크리트 복공판을 쓴 건설현장에선 각종 하자로 인한 불만과 비용 청구가 잇따랐다. 업계에선 예산절감 효과보다 하자로 인한 추가 비용부담이 더 크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퇴출될 거라고 생각했던 콘크리트 복공판은 현재까지 서울지하철 공사현장을 중심으로 수도권 전역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허는 특허일 뿐 시공성과 안전성을 담보해주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저가 복공판, 강도ㆍ소음 ‘불량’
임시 다리 역할을 하는 복공판의 주요 재료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강재(스틸)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가 펴낸 ‘복공판 설계편람(2017)’에 따르면 국내에서 생산되는 강재 복공판은 사용 형강의 종류와 복공판 길이에 따라 크게 5가지 유형(A∼E형)으로 나뉜다.
A형은 ‘ㄷ형강’(높이 125㎜, 폭 65㎜)’을 사용한 복공판으로 개당 중량이 280㎏으로 가장 가볍고, 가격도 싸서 가장 많이 쓰인다. 하지만 내력이 작아 고하중용으로 쓸 수 없고, 보도용으로만 사용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채널(Channel) 또는 ㄷ형강 복공판으로 불린다.
이른바 ‘철판 복공판’으로 부르는 B형은 폭이 좁은 ‘H형강’(높이 200㎜, 폭 100㎜)을 넣고 상부를 철판(6T)으로 용접한다. 형강끼리 직접 용접하지 않아서 특정부위에 하중이 쏠리면 내력이 약해지는 게 단점이다. 보통 복공판 한 개당 4∼5개 H빔을 쓰는데, 개수를 너무 줄이면 ‘텅 빈 복공판’이 나온다.
C∼E형은 모두 강성이 좋은 H형강(높이 190㎜, 폭 197㎜, 세로 두께 5㎜, 위ㆍ아래 두께 7㎜)을 서로 용접해 만든다. 미끄럼 방지용 체크무늬 H빔을 쓴다고 해서 ‘무늬H빔 복공판’으로 부른다.
C형은 측면과 길이 방향 단부를 개방하고, D형과 E형은 복공판 내부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철판으로 폐쇄한다. E형은 D형(폭 997㎜, 길이 1990㎜)과 동일한 형식이지만 길이가 2990㎜로 더 길다.
일반적으로 강성은 콘크리트 복공판이 가장 약하다. 강재 복공판의 경우 채널, 철판, 무늬H빔 순으로 강도가 세다. 차량 통과시 소음은 무늬H빔 복공판이 가장 적고, ‘채널 < 철판 < 콘크리트’ 순이다.
복공판 공급가격은 강성ㆍ소음도와 반대다.
일반적으로 콘크리트 복공판은 새 제품이 25만∼27만원선에 공급된다. 강재 복공판은 △철판 25만∼27만원 △채널 29만∼31만원 △개방형 무늬H빔 34만∼40만원 △폐쇄형 무늬H빔(대만 수입산) 32만∼38만원 수준이다. 이는 일반구조용 압연 강재(SS강종) 기준으로, 용접구조용 압연 강재(SM강종)를 원재료로 쓴 복공판은 5만원 더 비싸다.
구조 안전성과 노면 접지력이 좋은 무늬H빔 복공판은 상대적으로 비싸 교차로 등 일부 구간에만 쓰인다.
실제 한강의 A대교 가교의 경우 당초 채널 복공판으로 설계된 급경사 구간을 강성이 좋은 무늬H빔 복공판으로 바꿨다. 다만 가교 본선구간은 당초 설계대로 일반형 복공판을 썼다. 현장을 가보니 본선에도 강성이 필요한 가장자리에는 무늬H빔 복공판을 썼다.
◇복마전 부추기는 설계기준ㆍ발주방식
최근 복공판 제품군은 특허를 앞세워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4월 ‘가설교량 및 노면 복공 설계기준’을 바꾸면서 복공판의 규격ㆍ치수와 종류 규제를 푼 것이 기폭제가 됐다. 설계차량하중, 허용응력 등 일정 성능기준만 충족하면 복공판의 규격, 자재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업체는 하나의 H빔으로 복공판 2개를 제작하는 특허를 냈고, 실제 지방 O시청 지하도로 공사현장에 쓰고 있다.
복공판 전문가는 “다양한 복공판 제조를 장려한다는 취지와 달리 현장에선 부실 복공판이 판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부 강판 두께를 줄이거나 불량 중국산 강재를 수입해 쓰는 일이 빈번해질 것이란 얘기다.
복마전 양상을 띠는 복공판 제조업계의 과열경쟁을 더 격화시킬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현재 복공판 상위업체들은 상당수가 관련법규 위반으로 업체명을 바꾸거나 고소ㆍ고발 중인 경우가 많다.
업계 수위를 달리는 A사의 대표는 옛 B사 대표의 아내다. B사는 관련법령을 위반하고, 철강업계에서 평판이 나빠지자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C사는 국내 판매금지 대상인 중국업체의 철강제품을 썼다가 적발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D사 대표는 옛 E사 대표의 조카가 맡고 있다. 부실 콘크리트 복공판 문제로 검찰에 고발당하자 고의부도를 냈다는 얘기가 들린다.
역시 이름을 바꾼 F사는 중국산 복공판을 수입해 썼다가 법정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G사는 자체 제조공장이 없고, 시험성적서 조작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품질ㆍ안전보다 가격을 우선시하는 발주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불법ㆍ탈법이 판치는 복공판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태형기자 k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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