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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매년 기적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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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4-04 17:48:22   폰트크기 변경      

마당이 피바다로 변했다. 어스름 도는 이른 아침까지 잠을 자지 못해서인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있는지 살피러 나갔다가 마당에 혈흔이 낭자한 것을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현실일 리가 없는데도 놀라는 건 예방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실상은, 제법 거칠었던 봄비와 곡풍이 합세하여 동백나무를 괴롭힌 결과물이었다. 켜켜로 쌓인 붉은 것들은 젖은 탓에 흐물흐물 땅바닥에 눌어붙었다. 해가 다 뜨기도 전에 그것을 보았으니 착시를 일으킬만했다.

같은 장면을 보아도 사람마다 상상의 눈이 다른 까닭은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 때문이다. 붉은 꽃을 혈흔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곧이곧대로 동백꽃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불이 났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순간적인 착시 혹은 환시는 보통 사람에게도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가 쨍 솟은 후, 빗자루를 들었다. 아무리 비질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붉은 것들 때문에 목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떼야 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시멘트 바닥에 붙어있는 붉은 꽃잎들을 떼어내다 보니 동백 씨앗도 제법 떨어진 걸 보았다. 벚꽃은 이미 온 동네를 누비며 떨어지고 있었다. 봄은 떨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시작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봄은 끝이기도 해야 한다. 계절도 자연도 때마다 한결같지는 않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펼치다가 소나무 뒤에 숨어 있는 하얀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처녀 귀신인가 싶었더니, 최선을 다해 만개한 목련이었다. 꽃나무 종류가 워낙 많은 산마을이라 소나무 사이에 목련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가 보지 않아도 이맘때면 부지런히 만개했을 하얀 것을 내내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도, 미안한 마음을 담은 시선도 한곳에 오래 머무는가 보다. 이미 떨어진 붉은 것이야 어찌할까. 저 예쁜 하얀 것이나 오래 보아야겠다.

어떤 작가는 마흔이 넘어 봄을 만나는 일을 기적이라 말했다. 마흔이 넘었다면 잊지 말자. 매년 기적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은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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