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명예교수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게 낫고, 보는 것보다 만드는 게 낫다. 스케일에 관한 개념 없이 컴퓨터로만 작업하다보면 나중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안윤수기자ays77@ |
[e대한경제=김태형 기자] 강철과 유리, 콘크리트를 다양한 방식으로 버무려 만드는 현대건축은 예술(건축설계)과 기술(구조공학)의 합작품이다. 특히, 힘의 흐름을 디자인하는 엔지니어들이 예술적 자질을 갖췄을 때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좋은 건물’이 탄생한다.
‘K-컬처’를 이끌고 있는 스타 감독과 배우, 클래식 연주자까지 다방면에서 ‘좋은 예술가’를 대거 배출해 온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선 건축과가 미술원 소속이다. ‘더 깊게 사유하는 예술교육’을 내건 이 학교 건축과에선 오랫동안 예술과 기술을 융합하는 실험을 진행해왔다. 지난 20여년간 국내 대학 유일의 ‘구조 디자인’ 과목을 가르치고 2년 전 정년 퇴임한 박선우 명예교수(67)가 이 실험실을 이끌어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대칭 사장교(탑을 세워 케이블을 매달아 다리를 지탱)이자, S자 곡선의 유려한 디자인으로 각종 상을 휩쓴 ‘여의도 샛강다리’ 등을 설계한 국내 보행교(보도육교)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한국 건축계의 지성’으로 불리는 민현식 기오헌건축사사무소 대표(전 한예종 건축과 교수)는 “자연의 모든 사물 구조가 중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박선우의 건축 역시 안과 밖에서 작용하는 모든 힘을 땅으로 유연하게 전달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고 평했다.
박선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명예교수가 학생들이 만든 구조물을 살펴보고 있다./ 안윤수기자 ays77@ |
최근 CNP동양(전 동양구조안전기술)이 마련한 구조 디자인 교육을 위해 박 교수가 다시 강단에 섰다. 현대건설과 한화건설, 정림건축, 희림건축 등 현직 전문가들이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다. ‘베테랑 수강생’ 신상린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부사장(QC본부장)은 “국내 최고 구조 디자인 전문가의 강의를 직접 듣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정광량 CNP동양 대표는 “그의 퇴임과 함께 국내에서 모델을 활용한 건축구조 디자인 수업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강연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와 CNP동양 강의실에서 박 교수를 두 차례 인터뷰했다. 그는 내년까지만 주 5시간 강의를 맡을 계획이다. 박 교수는 건축구조 디자인에 대해 “건축과 공학 사이, 아름다운 형태와 수학적 구조 사이에 의미있는 다리 놓기”라고 정의했다. 다음은 그의 책(더 높게, 더 길게, 더 가볍게)과 인터뷰를 버무린 일문일답.
-어떤 건축물이 좋은 건축물인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구조물이다. 자연물처럼 군더더기가 없어야 자연스럽다. 아름다운 건축물이며, 동시에 기능을 만족해야 한다.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공간인데 에너지 소비가 비효율적이면 생활의 충족감이 떨어진다. 여름에 덥고 습하며, 겨울에 춥고 건조한 한국은 에너지 효율도 중요하다.”
-교수님의 구조 디자인 수업은 ‘모형으로 시작해 모형으로 끝난다’고 할 만큼 모델 작업이 많다.
“독일 유학 시절(아헨공과대, 도르트문트대)에 배운 방식이다. 설계자는 구조에 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구조 전문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떨어진다. 건축에서 디자인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조 지식도 필수적이다. 건축가들이 구조를 디자인할 때 수치적으로 접근할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구조 교육이 필요하다. 모형은 직접 구조를 만들고 비틀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교재다.”
대부분의 교수 연구실은 책과 논문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과거 박 교수의 연구실에는 책보다 학생들이 만든 대공간, 전망대, 보행교, 고층빌딩 등 다양한 구조물 작품들로 꽉 들어찼다. 그는 건축과 복도에 전시된 작품 하나하나를 누가 작업했는지, 학점은 어땠는지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나는 항상 문견작(聞見作)을 주장한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게 낫고, 보는 것보다 만드는 게 낫다. 나는 2차원 도면 평가보다 3차원적인 평가가 정확하다고 믿는다. 스케일에 관한 개념 없이 컴퓨터로만 작업하다 보면 나중에 괴물이 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스케일 감각을 사람에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 눈높이로 볼 수 있어 과하지 않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고 했다.
박선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명예교수./ 안윤수기자 ays@ |
한예종 건축과 학생들은 5년간 건축구조의 이해(1학년), 구조역학(2학년), 구조 시스템(3학년), 구조 디자인(4학년), 기술 스튜디오(3학년, 5학년) 등 구조 관련 수업을 듣는다. 이 수업을 들으려면 누르는 힘인 ‘압축력’, 당기는 힘인 ‘인장력’, 휘어지는 힘인 ‘휨력’, 절단하는 힘인 ‘전단력’ 등 4가지 힘을 알아야 한다. 첫 실습 구조는 보와 기둥이다. 보는 휘어지는 힘인 휨력, 즉 모멘트(회전력)를 받는 구조재고, 기둥은 누르는 힘인 압축력을 받는 구조재다.
1학년 2학기 ‘구조 이해’ 과목은 박선우표 수업의 진수다. 일반적인 건축구조공학 수업은 건물에 가해지는 힘을 정확한 수치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물리적 방법을 계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박 교수는 건축구조를 시각적으로 인지하도록 가르친다.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제는 이쑤시개와 실을 이용한 트러스 구조 만들기. 잘 만든 반구형태의 트러스 구조물은 책 스무권은 물론이고 판을 깔고 학생이 올라가도 무너지지 않는다.
박 교수는 “전문용어를 수식적으로 이해시키는 대신 몸으로 개념을 익히고, 실물 모델을 제작하고, 그 위에 무게가 나가는 것을 추가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고, 여기에 설명을 부연하면 뇌가 그저 수식을 외우는 것보다 강하게 각인한다”고 설명한다.
다음 학기 ‘구조 역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힘의 크기를 수치로 유도하는 방법을 배운다. 더 전문적이고 공학적인 이 수업에서는 힘의 흐름을 탐구한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건축구조 계획을 세우려면 힘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구조 디자인’과 ‘기술 스튜디오’는 2∼3인이 조를 이뤄 건축물을 직접 디자인하고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해보는 통합 설계과목이다. 박선우 교수 수업에선 C나 D 학점이 없다. 점수가 후해서가 아니라 완성도 낮은 과제는 아예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맨투맨 방식으로 끊임없이 가르치고 토론하고 부대끼면서 건축 구조물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한 마디로 ‘될 때까지 한다’. 박 교수는 “한 학년당 20명 안팎의 소수정예인 한예종 건축과여서 도제식 교육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각가 안규철(한예종 조형예술과 교수)은 “숫자와 공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구조의 원리를 이해시키려는 교육방식”이라고 평했다.
박선우 수업에서 학교 건물은 가장 좋은 실습 재료다.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는 조선 20대 임금 경종의 묘 ‘의릉’에 터를 잡고 있다. 건축과가 있는 미술원은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쓰던 건물을 일부 리모델링해 그대로 쓰고 있다. 박 교수는 1970년대 지어진 교내 낙후된 건물을 선택해 뼈대만 남기고 리모델링하거나 신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04년에는 길이 47m, 폭 32m, 높이 12m의 교내 체육관을 현대적 건축물로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를 과제로 냈다. 이 밖에도 미술원 회랑과 학생회관, 무대 실습실, 관리소 등이 실습 모델로 등장했다.
-여전히 건축 디자인에서 구조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쉽다.
“건축가가 건축물의 형태를 결정하면, 구조 엔지니어는 그것이 안전하도록 적절한 부재를 선택하거나 보강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 나에게 건축 디자인과 구조 디자인의 분리는 의미가 없다. 건축 디자인으로부터 구조 디자인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해소되어야 한다.”
-정년에 이어 진짜 퇴임을 앞두고 있는데.
“후임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국내 건축업계가 설계냐, 공학이냐 양자택일해야 제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은 무슨 사건이 터져야 건축물의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그전엔 비주얼(디자인)만 관심사다. 건축에서 디자인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조 지식도 필수적이다. 건축가들이 구조를 디자인할 때 수치적으로 접근할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도록 건축 대학에 체계적인 구조 교육이 필요하다. 건축의 질은 디테일이 좌우하는데, 디테일 교육이 부족한 것도 개선해야 한다.”
[박선우 교수는?]
김태형기자 k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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