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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권, 호랑이, 35×52cm, 2022. |
설을 눈앞에 두고 문간에 붙여볼 요량으로 문배도(門排圖) 한 점을 꺼내들었다. 활터의 과녁 같은 눈매의 호랑이 가족을 그린 것이다.
구불구불 소나무 아래 커다란 어미호랑이를 중심으로 꼭 닮은 세 마리의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까닭에 오히려 해죽하게 벌린 입이 싱글 벙글이다. 뱅글뱅글 붉게 도는 눈매와 텁수룩한 터럭의 곳곳마다 묻어 있는 유쾌함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일명 ‘술 취한 호랑이’다. 나름의 애칭으로 불러온 이 그림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희로애락의 길목에서 만난 적지 않은 인연들과 함께한 추억들마저 투영해보게 된다.
문배도는 정월 초하룻날 새벽, 문간에 붙여 늘 닥칠지도 모를 질병이나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기를 갈망하려 했던 그림을 의미한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염원이 담긴 전통 풍습으로 호랑이, 닭, 개 등 현존하는 동물이나 용, 해태 등 상상 속에서 전해오는 소재에 의미를 부여코자 했다.
특히 옛 민간에서는 잦은 호환(虎患)으로 인해 호랑이가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두려움을 순응과 역설적으로 흡수하며 숭배와 경배, 벽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민간을 중심으로 한 독창적인 기전(記傳)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민화에서는 호랑이가 해학적이고 이웃집 사람들과 같은 친근한 모습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문배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화마나 질병 등의 재앙 속에서 보호받고 이를 뛰어넘어 행운마저 가져다줄 것을 기원하며 민간에 전승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찬찬히 살펴보니 술에 취한 듯 뱅글뱅글 어리숙했던 호랑이의 눈매가 마치 돋보기 안경을 쓰고 날카롭게 뭔가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며 다음과 같은 사자성어를 떠오르게 한다.
삼성오신(三省吾身),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 BC506∼436)가 한 말이다. 날마다 스스로 행한 일 가운데 반성할 일이 없는지를 되짚어본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충실했는지(爲人謀而不忠乎), 벗의 신의를 잃진 않았는지(與朋友交而不信乎),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았는지(傳不習乎). 이 세 가지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으로 문배도를 다시 보니 어미 호랑이는 자신으로 대변되고 이를 둘러싼 세 마리 새끼는 날마다 점검해봐야 할 삼성오신처럼 다가온다. 이왕지사, 문배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신년 초 우일신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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