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 결과에 국내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숱한 한일전에서 지기도 했고 이기기도 했지만, 콜드게임을 겨우 면한 성적은 다소 충격적이다. 야구를 보며 섭섭함과 실망감을 느꼈지만, 선수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비난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점잖은 비판에 속하지만, 선수들에게 절실함이나 간절함이 없다는 ‘지적질’도 못마땅하다.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보다 더 절실한 사람이 누구일까.
정신력 지적도 옛 풍월을 읊는 것 같다. 과거 ‘절대 일본에 질 수 없다’라는 비장함은 미덕이었다. 경기력에서 일본이 한 수 위였지만, 일본만 만나면 죽기 살기로 임하는 우리 팀이 예상과 다른 결과를 연출하곤 했다.
스포츠에서 정신력이 중요하지만, 스포츠가 과학이 된 지 오래다. ‘절대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정신력을 넘어서 ‘절대 일본에 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일본의 한 야구 평론가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우리가 외인 용병한테 의존하며 자국 투수를 키우는 데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4번 이후 타자 대부분이 35세 전후로, 세대교체에 실패했다고도 평가했다. 상대방의 분석이라고 무시하면 그저 기분만 상하겠지만, 곱씹어본다면 의미 있는 조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 지면 안 된다는 국민적 요구가 우리 선수들을 짓누른 건 아닐까. 세상이 달라졌고 세대는 변했다. 국가의 명예를 짊어진 선수보다 경기를 즐기는 선수가 필요하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껌 좀 씹었다고 비난을 쏟아내는 세태는 구닥다리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정상회담을 하러 일본에 간다. 만약 양국 정상의 대화에서 야구가 화제로 오른다면 우리 대통령 입장에서는 조금 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우리 야구팀이 8강에 올랐다면, 정상 사이에 덕담이 오갔을 텐데 조금 아쉽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비행기가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한일관계 개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내놨다.
그런데 현재 스코어로는 한일 외교전에서 우리가 밀리는 모습이다. 배상금은 우리 기업이 대신 주고, WTO 제소 절차는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반기면서도 아직 내놓은 것은 없다. 경기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사이 좋게 지내라’며 우리의 양보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래저래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또 하나 걱정되는 점은 혹시 대통령과 정부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절실함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절실함은 외교무대에서 독이 될 수 있다. ‘절실한 이’와 ‘느긋한 이’가 벌이는 협상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절실함은 조급함으로 변하기 쉽다.
대통령에게 구원투수는 없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놓여있다는 패에 새겨진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라는 문구처럼 9회까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9회까지 완투하는 데 필요한 것이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이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절실함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깨에 힘을 빼는 것도 필요하다. 당장 결과를 만들려고 급급하기 보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는 게 더 나은 경기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 결과가 WBC와는 다르길 바란다.
김정석 정치사회부장 j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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