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 방지할 첨병 역할 부실”
‘턱없이 부족한 비용ㆍ시간’…불공정 관행 만연
국토교통부가 지난 1월31일 고시한 ‘제5차 시설물의 안전 및 유지관리 기본계획(2023∼2027)’에 반영된 안전진단 용역 저가계약 현황./ 자료 : 국토교통부 제공 |
[대한경제=한형용 기자] 우리나라 ‘시설물 정기안전점검 시스템’이 경기 분당구 정자교와 함께 무너졌다. 6개월마다 1차례씩 진행하는 정기안전점검에서 ‘양호’ 평가를 받아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지만,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보행로는 무너져내렸고 2명의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관행화된 발주처의 저가입찰 유도와 시간에 쫓기듯 추진되는 이른바 ‘수박 겉핥기식’ 점검, 그리고 과업대가를 반영하지 않은 업무수행을 요구하는 불공정 관행이 불러온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10일 경기도와 성남시 등에 따르면 분당구는 지난해 8월 ‘2022년 하반기 교량 정기점검 용역 2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정자교 등을 포함한 68개소 교량 점검 용역을 발주했다. 과업기간은 90일, 예정가격은 2594만9000원이다. 1주일이라는 짧은 공고 기간에도 30여개 안전진단업체가 입찰에 참여했고, 낙찰자는 2270만원 규모로 사업을 수주했다.
문제는 과업 규모다. 업계에 따르면 정기안전점검은 최소 2명 이상의 기술자가 현장에서 육안으로 시설물에 내재된 위험요인을 조사한다. 교량 등 높이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때에는 장비 등을 동원해야 하며, 추가 기술자를 투입해야 한다.
이들 68개소의 현장 여건은 다르지만, 상ㆍ하부와 받침 장치와 손상 지점 등을 살펴보는 점검시간은 평균 반나절 이상 걸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단순 계산하면 68개소를 90일간 점검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주말 등 쉬는 날까지도 현장 점검과 보고서를 준비해야만 한다.
특히, 68개소별 비용을 따져보면 1곳당 점검 비용은 고작 33만원 수준이다. 현장 조사와 시험 등을 통해 물리적ㆍ기능적 결함요인을 확인하고, 신속ㆍ적절한 조치 및 보수ㆍ보강 방법 등을 제시하는 과업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 과정에서 과거 점검결과를 일부 문구만 수정한 채 새롭게 작성한 것처럼 눈속임하는 사례도 등장한다는 게 안전점검업계의 지적이다. 실제 이번 과업 대상에는 육안으로도 뒤틀림이나 꺼짐이 확인돼 통행을 제한한 불정ㆍ수내교도 포함됐고, 정기안전점검의 부실 의혹은 더 커졌다.
곽수현 한국시설안전협회 회장은 “성남시 분당구에서 발주한 노후 교량의 정기안전점검 비용은 1개소당 33만원꼴이다. 안전점검으로 대형사고를 방지하자는 제도 취지가 무색할 정도의 예산”이라며, “안전 점검 대가는 FMS(국토부 시설물 통합정보 관리 시스템)에 맞춰 나온다지만, 사업비 자체를 80%가량 낮춰 기초가격을 제시한 뒤 입찰을 유도하고, 이후 또 87.75% 수준에서 낙찰자를 선정하는 구조다. 기업 입장에서는 결국 저가로 용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시설안전협회는 이를 위해 현재 국토교통부와 저가낙찰 개선책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달 말까지 사례를 조사해 국토부와 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앞서 국토부는 지난 1월 ‘제5차 시설물의 안전 및 유지관리 기본계획(2023∼2027)’을 고시하고, 건축ㆍ민간분야 저가계약 문제와 발주처의 계약범위 외 업무수행 등 불공정 관행에 제동을 걸 계획이다. 기본계획에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교량ㆍ터널 등 안전진단 용역 10만여건 중 82%인 8만7000여건이 사업비의 70% 미만으로 계약했다는 조사결과가 반영됐다.
특히 공공사업 분야에서는 같은 기간 발주된 4만7664건 사업 중 대가기준 70% 미만으로 계약한 사업이 1만1669건(24%)으로 집계됐다. 50% 미만은 1만877건(23%), 30% 미만은 8032건(17%)로 나타났다. SOC 시설물 유지 관리를 위해 시행하는 안전관리 사업 상당수가 부실하다는 의혹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엔지니어링업계 한 임원은 “정기안전점검은 큰돈을 투입하지 않고 안전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좋은 제도”라며, “이러한 돈을 아끼다 보니 SOC 유지관리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봐야 한다. 전수조사를 진행하면서 사후 수습 대신 사전 투자를 통해 사고를 예방하는 제도 취지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행로가 무너지며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도 성남시 정자교에서 7일 오전 경찰과 국과수 등 관계자들이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한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사진 : 연합 |
한형용 기자 je8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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