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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주로 칼럼] 관수 레미콘과 그레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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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5-08 08:08:25   폰트크기 변경      


고대 로마는 통치 자금 압박에 은화의 액면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였다. AD 54년 100%에 가까웠던 은 함유량은 211년 50%, 268년 4%로 줄더니, 패망 시점에는 아예 라디에이트로 대체됐다.

은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순도 높은 은화는 시장에 풀지 않고 품 안에 모셨다.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불량 화폐뿐이었다. 이를 두고 토머스 그레샴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했다. 이른바 ‘그레샴의 법칙’이다.

오늘날 그레샴의 법칙은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으로 비대해진 행정업무가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때 사용된다.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도입된 공사용 자재 직접구매제도 하에서 탄생한 ‘관수레미콘’도 여기에 해당한다.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지역 레미콘조합과 정부의 ‘단체수의계약’이 시작된 시점은 200만호 주택공급정책이 가시화된 1986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레미콘사들은 규모가 엇비슷했다. 일부 레미콘사는 안정적인 관급 물량 확보를 바탕으로 품질관리와 적기납품 경쟁력을 앞세워 민간 영업을 확대했다. 그렇게 9개 중견ㆍ대기업사들이 탄생했다. 이들 회사는 대형 건설사와 기술협업을 통해 공기와 인건비를 줄여주는 특수콘크리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레미콘 경쟁의 시기였다.

그러나 2005년 정부가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레미콘에 ‘관급’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경쟁은 무의미해졌다. 시장의 80%를 장악한 중소기업들은 정부 보호막에 갇혀 품질경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조달청은 기업 간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19년 다수공급자계약방식(MAS)을 도입했지만, ‘피터팬 증후군’에 빠진 중소 레미콘사들은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제도 내 기생할 궁리에만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중소 레미콘사로 이뤄진 지역 조합은 막강한 힘을 얻었다. 발주기관은 조합의 등쌀에 못 이겨 규정에도 없는 ‘중견ㆍ대기업 입찰제한’을 입찰 조건으로 내걸었고, 입찰을 집행한 조달청은 이를 방관했다.

단적인 예로 올해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수도권에서 3차례 나눠 발주한 230억원짜리 물량은 모두 지역 조합원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것도 낙찰률 99.95%의 수의계약이었다. 현장 바로 앞에 공장을 둔 대형 레미콘사는 입찰 참여조차 못했다.

더 큰 문제는 품질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기업 레미콘사 A임원은 과거 성남 위례신도시 사업 때 일을 털어놓았다. 견적을 뽑아보니 LH 성남사업소의 콘크리트 시방서를 준수할 경우 ㎥당 8000원가량의 손해가 발생했다. A임원은 입찰을 포기하면서, 지역 조합사에도 원가분석을 다시 해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지역 10여개 조합사들은 납품을 강행했다.

A임원은 “당시 지역 조합사들이 시방서대로 레미콘을 전량 납품했다면 사업 완료 시점까지 손해액은 대략 100억원대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레미콘사도 계약 전후로 조달청에 가격 조정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순간이다.


최지희 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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