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사회공동체를 움직이는 법을 만드는 헌법기관이다. 과거에 왕권이 국가 시스템의 정점에 있을 때는 왕이 법도 만들고 통치도 같이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태동하면서 선수와 심판이 분리되듯, 법 집행은 대통령과 행정부가 하더라도 법을 만드는 역할은 국회가 맡는 구조로 권한이 나눠졌다. 국회가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갖게 된 배경이다.
국회의 기능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해 공동체가 원만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기준과 원칙을 만드는 데 있다.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는 성장과 산업화를 명분으로 ‘분배’ 요구를 억누를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욕구가 거침없이 분출되는 민주화 시대에는 그런 기능이 더더욱 필요하다.
국회의원을 시험이 아닌 선거를 통해 뽑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그런 역할의 적임자에겐 힘이 센 것도, 성적이 우수한 것도 중요하지 않다. 국민과 원활히 소통하면서 민생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충실히 파악하고 입법의 장으로 가져와 법률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입법에 열중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국익의 관점에서 옥석을 가려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좌파 정당은 약자의 권리와 정부 역할, 평등과 분배 등에, 우파 정당은 전체의 효율성, 시장 기능, 자유와 성장 등에 각각 역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당의 역할이 지지층의 특수이익에 집착해 ‘숲’을 못 본다면 이익단체와 다를 바 없다. 이익단체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이익이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의회나 행정 기관 따위에 압력을 가하는 단체나 조직’이다. 입법권을 가진 정당이 이익단체처럼 움직인다면 그 결과는 위험천만이다. 이익단체를 뛰어넘는 공당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21대 국회 임기 4년차를 들여다보면, 다수 야당은 ‘특정한 이익’을 위한 법안들을 강행 처리하며 정부여당과 갈등을 빚고 있다. 강성 노조를 위한 노란봉투법안, 쌀농가를 위한 양곡관리법안, 간호사를 위한 간호법안 등이 그 사례다.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사전 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법 자체가 우리 사회의 불안 뇌관이 될 수 있다.
여당이 반대하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이 최종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번에는 앙갚음으로 정부여당이 목을 매는 법안들을 붙잡는다. 재정건전성을 위한 재정준칙법안, 부동산시장 정상화를 위한 규제완화법안, 내수 진작을 위한 감세법안 등등. 결과적으로 국회의 저생산성에 여야가 공범이 된다. “누가 더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지 보자”면서 여야가 ‘치킨게임’을 벌이는 양상이다.
헌법 제46조 제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당이 지지층을 의식해 특정 이익을 대변하더라도 입법은 국익의 관점에서 완성돼야 한다. “이익집단과 다를 게 뭐 있나”는 지적을 듣고 싶지 않다면, 대화와 협상을 통해 국익에 부합하는 타협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로서 국민에 대한 보답이다.
권혁식 논설위원 겸 정치전문기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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