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공사 준공표지석과 달리
토목시설물에는 최근까지도
세 중 하나는 설계업체 없어
산업가치 달라졌지만 '관행화
고부가가치로 경제견인한 엔지니어링
일부 발주기관, 버젓이 용역 취급
글로벌 엔지니어링 강국 위해선
산업 종사자 사기ㆍ자긍심도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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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사 준공표지석(좌측)에는 발주자, 설계ㆍ감리사, 시공사 등이 모두 명기돼 있지만 토목공사 준공표지석(우측)에는 발주자와 시공사만 있고 설계사는 빠져있다. |
한때 엔지니어링을 용역이라고 불렀다. 엔지니어링산업의 기반이 되는 법률인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도 1973년 제정 당시에는 기술용역육성법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당연히 엔지니어링업체들의 모임인 협회도 한국기술용역협회로 시작됐다. 용역이 엔지니어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2년 기술용역육성법이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으로 전면 개정되면서다. 이에 맞춰 협회의 명칭도 엔지니어링진흥협회(현재는 한국엔지니어링협회)로 바뀌었다. 이처럼 용역이란 용어가 엔지니어링으로 바뀐 것이 30여년이나 됐는데 엔지니어링업계 종사자들은 “아직도 엔지니어링을 용역으로 평가절하해 홀대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준공표지석을 한번 봐보세요. 건축구조물에는 시공사와 설계사, 감리사까지 자세히 명기돼 있는데 토목구조물에는 시공사만 명기돼 있는게 보통이에요. 어떤 곳은 감리사까지 넣으면서 설계사를 빼기도 하고요.” 사석에서 만난 한 엔지니어링업체 대표는 엔지니어링업체들이 홀대를 받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굳이 토목구조물의 준공표지석에서 설계사를 뺄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이렇게 생긴 의문을 풀기 위해 준공표지석들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건축구조물은 사무실 근처 한 블록만 돌아봐도 쉽게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토목구조물은 준공표지석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어렵거니와 보통의 발품으로는 몇곳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준공표지석 전문업체의 사이트를 검색해 봤다. 다행히 한 업체의 사이트에서 이 업체가 만들어 설치한 수백개의 준공표지석이 올라와 있다. 그것도 현장에 설치한 표지석을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다.
앞쪽에 배치된 50여개의 표지석을 둘러봤다. 2017∼2018년 준공한 시설물들이다. 먼저 토목공사의 준공표지석을 살펴봤다. 주로 도로개설이나 하천정비공사다. 확인결과 발주자와 시공사 이름은 표지석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설계사 이름은 셋 중 하나는 없다. 반면 건축공사 준공표지석에는 건축주와 설계ㆍ감리사, 그리고 시공사가 모두 명기돼 있다.
준공표지석만 놓고 보면 토목 설계사는 건축 설계사와 비교해 홀대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모임에 초청돼 갔는데, 다른 사람은 다 소개하면서 나만 빼먹는 그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엔지니어링업계는 토목공사 준공표지석에서 설계사가 빠지는 이유를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옛날부터 그래왔으니 관행적으로 지금도 일부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산업의 태동
엔지니어링산업의 시작은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엔지니어링협회 40년사에 따르면 1957년 8월15일 당시 내무부 토목국장 출신인 김해림씨가 도화설계사무소(현 도화엔지니어링)를 설립하면서 토목 기술용역업체가 출현했다. 당시는 관청에서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설계업무 없이 관청에서 설계한 도면의 제도를 해주는 시공부문 중심의 노동집약적인 업무였다. 설계의 주체가 관청이니 단순 용역을 제공하는 기술용역업체를 준공표지석에 넣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용역업이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다. 종합적인 국토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건설산업이 활기를 띠게 되고 기술용역업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당시 건설부는 1963년 3월 건설용역업자관리규정을 제정해 건설용역업체의 자격을 규정하고 자본, 기술, 시설능력 등을 건설부에 등록하도록 했다. 관리규정이 제정됐는데도 불구하고 등록업체는 많지 않았다. 1965년 12월 대한건설기술용역협회가 창립됐는데 회원사는 16개사에 불과했다. 그렇더라도 관청이 수행하던 설계가 기술용역업체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1963년 국제산업기술단(현 한국종합기술)이 정부 재투자기관 형태로 설립됐는데, 발주처들이 여기에 설계를 맡겼던 것이다. 특히 차관과 연계된 국토개발계획사업의 설계는 국제산업기술단이 전담했다는게 한국종합기술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제산업기술단은 1966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로 상호가 변경됐고 1994년 민영화됐다.
건설용역업자관리규정의 제정이 기술용역업이 성장하는데 도약의 발판이었다면 비약적인 성장의 시작점은 기술용역육성법이 제정된 1973년 2월부터다. 이전까지 기술용역업은 건설과 관련된 부수적 산업부문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법이 제정되면서 플랜트 설계라는 개념으로 확대돼 법적인 업종으로 정립됐고 기술용역업이 하나의 산업으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용역’ 지우기 30년
엔지니어링업계는 그동안 산업이미지에서 용역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용역이라는 단어가 엔지니어링산업을 담기에는 너무 좁고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용역의 사전적 의미는 ‘물질적 재화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이다. 용역업은 ‘경비, 청소, 운송 등과 같이 주로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육체적 노동을 제공하는 영업’이라고 설명돼 있다. 엔지니어링에 따르는 수식어 중 하나가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용역과 용역업의 사전적 의미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용역지우기의 첫 성과는 1992년 기술용역육성법이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으로 전면 개정되면서 이뤄졌다. 개정법률은 기술용역이란 용어를 엔지니어링으로 바꿨고 민간의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해 엔지니어링활동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규제사항을 최소화했다. 종전 등록제를 신고제로 전환한 것이다. 여기에 엔지니어링산업의 진흥을 위한 지원시책을 확대하는 내용도 담았다.
하지만 건설산업에서는 변화의 속도가 한참이나 더뎠다. 2021년 6월이 돼서야 건설기술진흥법(건진법)에서 설계ㆍ건설사업관리 등을 아우르는 건설기술용역이 건설엔지니어링으로 바뀌었다. 이에 맞춰 국토교통부가 관장하는 건설산업기본법, 건축법, 도시개발법 등에서도 건설기술용역이 건설엔지니어링으로 변경됐다. 기술용역육성법이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으로로 바뀐지 29년 만의 일이다.
건진법의 개정에 따라 국가계약법령과 지방계약법령의 개정도 이어졌다. 2021년 9월 개정ㆍ시행된 국가계약법시행령과 지방계약법시행령은 건설기술용역을 건설엔지니어링으로, 건설기술용역사업자를 건설엔지니어링사업자로 각각 변경했다. 하지만 하위규정인 용역계약일반조건과 용역입찰유의서에서는 용역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 중에 있다. 이는 이들 기준이 엔지니어링뿐 아니라 다른 용역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 발주기관들은 입찰공고문에 엔지니어링과 용역을 혼용해 쓰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지난달 2일 고속국도 제55호 중앙선(김해공항-대동) 확장공사 타당성 및 기본설계 엔지니어링을 발주했다. 한국철도공단은 이달 5일 신분당선 광교~호매실 통신설비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을 공고했다. 조달청은 이달 7일 서울교통공사 수요의 23년 2호선 방배~사당역간 운행선 도상개량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을 발주했다. 한국도로공사는 엔지니어링으로 용어를 바꾼 반면 한국철도공단과 조달청은 용역이란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산업발전 견인 서비스 산업
‘엔지니어링산업은 제조업ㆍ플랜트ㆍ건설 등 전 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소프트파워 산업이다. 산업에 과학기술과 지식을 접목해 부가가치와 경쟁력을 제고하는 지식 기반의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2022년 기준 국내시장 규모는 350억달러에 달하고 해외시장 규모는 4조4000억달러 수준이다. 여기에 향후 5년간 5% 이상의 고성장이 예상되는 산업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현재 수립 중에 있는 제3차 엔지니어링산업 진흥계획(2023∼2025년) 초안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엔지니어링산업은 과거 태동 당시 관청에서 주는 단순 용역이나 수행하는 산업이 아니다. 산업부는 엔지니어링산업을 ‘전 산업의 발전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서비스산업’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중요한 산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일부 발주처는 아직까지 준공표지석에서 설계사를 누락시키고 있다. 그저 관행이라고 얼버무리기에는 사안이 중대하다. 엔지니어링 종사자들의 사기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입찰공고문에 버젓이 용역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발주처들도 마찬가지다. 국가계약법령과 지방계약법령은 지난 2021년 용역을 엔지니어링으로 바꿨는데도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저 생각없이 해온 일을 그대로 하는 소극행정의 전형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산업부는 제3차 엔지니어링산업 진흥계획을 통해 글로벌 엔지니어링 강국으로의 도약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디지털ㆍ친환경 산업 전환, 글로벌 시장 개척, 산업 성장 인프라 확충, 선진형 제도 혁신 등 4대 핵심과제를 추진할 방침이다. 이에 더해 아직도 엔지니어링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잘못된 관행들을 고쳐 나가는 일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엔지니어링산업 종사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낄 때 글로벌 엔지니어링 강국으로의 도약이 빨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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