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권해석 기자]주택가격 일부를 보증금으로 맡기고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는 전세가 언제 우리나라에 나타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전당(典當) 제도에서 그 뿌리를 찾기도 하고, 조선말 개화기 한양을 중심으로 주택 전세가 대중화됐다는 연구도 있다. 아무튼 최소 100년 이상 된 제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에겐 오래됐지만 전세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국가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그렇다 보니 외국인이 우리 문화 가운데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로 뽑히기도 한다. 집값의 절반이 넘는 큰돈을 생면부지 집주인에게 맡기는 위험한 행위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전세는 위험하다. 전셋값 급등과 깡통전세 혹은 역전세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1∼2년 전의 전셋값 급등이 끝나자 바로 보증금 미반환 문제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험천만한(?) 전세 거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세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유용하다는 경험 때문이다.
임대인은 전세를 활용해 적은 자본으로 자기 집을 소유할 수 있고, 임차인은 월세보다는 주거비용을 아낄 수 있다. 임대인에게는 자산 증식의 기회를, 임차인에게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다.
이처럼 유용한 전세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임대인에 비해 취약한 임차인의 대응력 때문이다.
전세로 집주인이 피해를 봤다는 사례는 거의 찾기 어렵다. 늘 보증금을 맡긴 세입자가 피해를 입는다.
보증보험 제도가 있지만, 오히려 전세사기에 악용되는 등 부작용도 상당하다. 경매를 통한 방식이 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전액 회수를 장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전세의 위험을 줄여야 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근시안적이다.
정부는 최근 역전세 해법으로 전세금반환 용도에 한해 임대인의 대출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집주인이 대출을 더 받아 전세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돌려주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직전 정부에서 전셋값 급등의 해법으로 세입자 전세자금 대출 확대를 내놨는데, 시간이 흘러 반대 상황이 되니 이번에는 임대인에게 대출을 더 제공하겠다고 한다. 세입자 전세대출 확대가 지금 역전세의 토양이 됐는데, 임대인 대출 확대가 해결사가 될 리 만무하다.
급한 불은 끌지 몰라도 구조적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머지않아 다시 전셋값 급등과 깡통전세의 순환 고리를 만날 것이다.
볼리비아에서는 전세 제도가 안전한 주택 임대차 제도로 인식된다고 한다.
국토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볼리비아에서 전세계약을 맺는 주택에는 아무런 저당이 없어야 한다. 경매 시 우선권자는 당연히 전세권자가 된다. 계약기간이 종료됐는데도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으면 주택 소유권이 세입자에게 자동으로 이전되는 장치도 있다.
볼리비아 제도를 그대로 이식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정부라면 국민들이 원하는 전세제도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전세가 위험한 건 전세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전세는 죄가 없다.
권해석 기자 haes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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