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고미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소전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은 2007년 타계하기까지 미술품 수집가로 풍요로운 문화 인생을 구가했다. 1947년 대영건설사를 창업해 회사 이름을 극동건설로 바꾼 그는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도자기와 서화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렸다. 건설자재 구입을 위해 일본 출장 갔을 때도 국내에서 반출된 한국 도자기에 유별나게 애착을 가졌다.
이런 고미술 사랑은 고려와 조선시대 국보급 도자기를 비롯해 320여점을 수집한 ‘큰손’ 컬렉터로 이어졌다. 1996년 5월에는 경기도 시흥소래산 자락에 소전미술관을 짓고 평생 모은 고미술품의 향기를 시민들과 공유하며 즐겼다. 김 전 회장이 비록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미술계에선 지금도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함께 즐기는 ‘동락(同樂)’의 정신을 실천한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소중히 아끼던 억대급 도자기 23점을 비롯해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그림 등 명작 135점이 한꺼번에 경매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서울옥션이 오는 27일 오후 4시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173회 미술품 경매’를 통해서다. 출품작의 총 예상가치는 85억원 규모다. 경기 침체로 미술품 가격이 조정을 받고 있는 만큼 비교적 싸게 베팅할 기회다.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여전히 주목을 받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 등에 컬렉터들의 ‘사자’ 열기가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환기의 ‘무제’ /사진: 서울옥션 제공 |
올 여름 경매에는 무엇보다도 김환기와 이우환의 대작이 단연 눈에 띈다. 세로 170cm 크기의 김환기 ‘무제’는 뉴욕에 머무렀던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제작된 반추상 작품이다. 이옥경 서울옥션 부회장은 “파리 작업 이후 작가의 작업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며 “조형요소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자연의 기운 생동에서 나타나는 리듬감과 운율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이우환의 ‘다이얼로그’ /사진: 서울옥션 제공 |
이우환이 2014년 러시아 모스크바 게리 타틴시안 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한 150호 크기의 대작 ‘다이얼로그’도 출품됐다. 넓은 캔버스에 회색 점 하나만을 덩그랗게 그린 게 이채롭다. 추정가는 9억~18억원이다. 앞서 지난달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는 미국의 사업가이자 열렬한 미술 컬렉터였던 제럴드 파인버그가 소장한 ‘다이얼로그’가 약 19억원(1126만5000홍콩달러)에 판매돼 ‘다이얼로그’ 시리즈 작품 중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백남준의 설치 작품 ‘TV 첼로’, 장욱진 특유의 해학적인 그림 ‘배와 고기’, 오윤의 ‘춘무인 추무의’ 등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새 주인을 찾는다.
서울옥션은 특히 이번 경매행사에 특별섹션으로 근현대미술 ‘시대여울’과 고미술 ‘동락’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시장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한국 근대미술 작가의 작품과 소전미술관의 도자기 컬렉션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대여울’ 섹션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한국 근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재조명한다는 취지로 다양한 작품을 구성했다. 전후 모더니즘을 실험한 이세득의 그림 ‘반도 호텔 벽화를 위한 원화’가 돋보인다. 반도호텔 다방 벽화 작업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희소성 높다는 게 서울옥션 측의 설명이다.
해방 이후 목가적 서정주의 화풍을 개척한 최영림의 초기작 ‘검은 태양’도 나온다. 검정색으로 한국적 해학미를 가미해 ‘건강한 예술성’을 구현한 작품이어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편이다.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오지호의 ‘설경’이 입찰 경쟁을 벌일 예정이다.
‘백자청화산수문주자’ /사진: 서울옥션 제공 |
‘청자상감포류문주자’ /사진: 서울옥션 제공 |
고미술 특별 세션 ‘동락’에서는 김 전 회장이 모은 소전미술관 컬렉션 도자기들이 줄줄이 경매에 오른다. 구절과 동체에 산수풍경을 그려놓은 ‘백자청화산수문주자’(추정가 1억8000만~3억원), 이색적인 형태와 고급스러운 문양이 도드라진 ‘청자상감포류문주자’(1억4000만원~3억원), 전면에 모란당초문을 가득 채운 ‘분청사기박지모란당초문편병’(1억~3억원) 등 국보급 작품들이 전통 한국도자예술의 위용을 자랑한다. 출품작은 경매 당일인 27일까지 서울옥션 강남센터 5층과 6층, 지하 4층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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