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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 Life] 인왕산에서 다리 건너 안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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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7-03 06:00:18   폰트크기 변경      

무악재 하늘다리


[대한경제=김정석 기자] “더 더워지기 전에 산 한번 타시죠.” “요새 내가 무릎이 안 좋아서 높은 산은 무리야.”

이렇게 시작한 단톡방에서는 날짜를 언제로 할지, 장소를 어디로 할지 ‘카톡’, ‘카톡’이 이어졌다. 구기동에서 시작해서 진관사로 내려오는 북한산 둘레길 7∼9 코스와 비교적 수월한 백련산+궁동산과 노고산, 비가 와서 계곡이 좋다는 북한산 산성입구∼대남문 등 후보지들이 오락가락했다.


결국 투표를 거쳤는데 결과는 7월1일, ‘인왕산+안산’ 코스다. 아침 8시에 만나서 넉넉잡아 12시, 정오 전에 끝내자는 계획이다.



△산불 상처 남은 인왕산


인왕산 성곽길 


아침 8시, 홍제역 2번 출구에서 일행을 만났다. 인근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인왕산 진입로를 찾는데 만만치 않다. 일행 중 누군가 예전에 가봤다는 입구를 찾았지만 자물쇠로 잠겨 있다. 등산객이 너무 많으니 아파트 입주민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물어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이쪽으로 오르려면 사전에 충분히 검색해봐야 할듯싶다.

오른쪽 위 기차바위를 보며 산을 오른다. 그리 가파르지 않다.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다른 지인들의 안부를 묻고 간간이 농담을 하며 걷는다.


그런데 산길이 유쾌함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왕산은 아직 아프다. 지난 4월 큰불이 났는데 ‘탄내’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아직 남아 있다. 곳곳에 검게 그을리고 죽은 나무들이 보인다. 불에 탄 등산길 버팀목을 교체하거나 보수하는 공사도 마주치게 된다.

그래도 불이 났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내가 오른 길 주변의 모습은 심각하지 않다. 이곳에서는 불이 덜했을까.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치유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몸통과 잔가지가 타버린 나무 끝에서 새 잎이 애처롭게 돋아나고 있었다. 대견하면서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상 표시석


여름은 여름이다. 정상에 오르니 꽤 덥다. 햇살은 뜨겁다 못해 아프다. 다들 그늘을 찾는다. ‘아이스케키∼’라고 외치는 상인들의 유혹이 달콤하다. ‘계좌이체 가능해요’라고 후렴을 붙이는데 산에서 핸드폰 안 터지던 시절이 생각났다. 최근 2살 어려졌지만, 역시 ‘옛날 사람’인가 보다.



△산과 산을 잇는 무악재 하늘다리


서울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산에 올랐을 때 남다른 느낌 중 하나가 내가 사는 도시를 위에서 둘러보는 일이다. 우리집도 찾아보고 저기가 어딘가, 어디가 저긴가 손가락질이 이어진다. 인왕산 정상에 다가서자 산보다는 도시를 내려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저 멀리 청와대도 보인다. 청와대 때문에 인왕산 산길 출입을 통제한 시절도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자니 주인이 떠난 청와대가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청와대


복원된 산성길은 제법 운치가 있다. 그렇지만 가까이에서 본 성벽은 옛스럽지 않다. 가짜 같다. 싼값에 공사를 맡은 업자가 찍어낸 느낌이라고 할까.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이리로 올라왔다면 만만치 않았을 듯 싶다. 내려가는 길에 무릎이 시큰거린다. 어렸을 때는 오를 때 힘들고 내려가는 길은 가뿐했는데 이제는 내려갈 때가 버겁다. 산 말고 다른 데에서도 제대로, 잘 내려가야 하는 나이다.


인왕산에는 제법 가파른 구간도 있다.


안산으로 건너가려고 ‘무악재 하늘다리’ 이정표를 거듭 확인했다. 안산과 인왕산을 여러 차례 왔지만,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넌 적은 없다. 안 한 적도 있고, 찾지 못해 못한 적도 있다. 방향은 알지만 정확한 진입로를 못 찾은 탓이다.

이번엔 꼭 한번 건너보자며 이정표를 잘 살피며 신중하게 따라가 마침내 다리를 만났다. 내려다보는 다리는 예뻤다. 2017년 안산과 인왕산을 생태적으로 연결한다는 취지로 건설했다고 한다.


무악재 하늘다리


도로가 없었을 때 안산과 인왕산은 연결된 산이었을 것이다. 인왕산이 호랑이로 유명했듯이 안산에도 호랑이가 나왔다고 한다. 이제 두 산을 이어주는 다리가 생겼지만, 호랑이가 건널 일은 없다. 아직 멸종되지 않은 다른 야생동물 역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 다리에 발을 디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명물이 됐다. 덕분에 인왕산에서 안산, 안산에서 인왕산으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인왕산만으로는 조금 모자란 코스에 안산을 더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


다리를 건너 밑에서 바라본 안산


△치유하는 산 ‘안산’


종로구 인왕산에서 다리를 건너 서대문구 안산으로 들어섰다. 산에서 산으로, 다리를 건너 넘어간다는 건 새로운 느낌이다.

다시 등산이다. 그런데 산 하나를 올랐다가 내려온 후 다시 산을 오르려니 느낌이 다르다. 큰 산 하나를 오르는 것보다 내려왔다가 오르는 게 더 힘든 것 같다. 다리가 풀린다.

일행 중 하나가 요새 젊은 애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약과’를 풀었다. 약과와 연양갱 같은 예전 ‘할머니 간식’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니 세월은 돌고 도는 듯하다.

다른 이는 냉커피를 내놨다. 당 떨어진다며 꿀이 든 홍삼액도 하나씩 나눠준다. 여름 산행에 선글라스, 팔토시, 썬크림은 기본이고 눈 밑부터 목까지 늘어지는 햇빛가리개가 ‘필수템’이 된지 오래다. 나 역시 챙기고 있다.

높이 338.2m의 인왕산은 높지 않은 산이다. 295.5m의 안산은 사실 ‘동네산’이었다. 그런데 산 한 바퀴를 쉽게 돌 수 있는 ‘무장애 숲길’을 조성한 후 지역 주민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실제로 이날 안산을 찾은 등산객 수는 인왕산 못지않았다. 이날따라 외국인들도 많았다.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이 크게 늘어난 건 이제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외국인들 사이에서 ‘K-등산’이 유행이라더니 ‘아 진짜네’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안산 메타쉐콰이어



안산에서는 메타세콰이어 숲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뿜는 피톤치드는 폐 속에 힐링을 불어 넣는다. 중간중간에 ‘나무향’을 맡으며 멍 때리거나 싸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많다.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해먹과 눕기 편한 벤치도 곳곳에 숨어 있으니 잘 살펴보자.


안산 정상 봉수대


안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봉화는 적의 침입과 같은 변방의 변고를 알리는데 남산이 최종 전달지였다. 이곳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를 거쳐 남산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 봉수대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봉수대는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가 복원했다.


안산 정상에서 아까 지나온 인왕산을 바라본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효자동에서 바라본 모습이라고 하는데 안산에서 보는 인왕산도 참 아름답다. 산불 때문에 또 미안하고, 사진을 예쁘게 못 찍어서 또 미안.


인왕산과 안산을 뒤고 하고 안산 정상에서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데는 20분 정도 걸렸다. 11시30분. 계획대로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


평안도에서 황해도, 경기도에서 한양으로 봉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다리는 섬과 육지를, 섬과 섬을, 육지와 육지도 연결한다. 오늘 보니 산과 산도 잇는다. 그러자 욕심이 난다. 세상과 세상,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런 다리가 떠올랐다.

불에 탄 인왕산은 지금 스스로 회복하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도 무장애숲길로 오를 수 있는 안산은 치유하는 산이다. 치유하는 이와 치유받는 이가 만난다. 머릿결을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인다.


글ㆍ사진=김정석 기자 j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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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부
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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