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한형용 기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경영권은 피보다 더 진했다. 숱한 기업에서 반복해온 형제ㆍ남매, 부모ㆍ자식 간 경영권 다툼은 LG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구인회 회장의 조부인 ‘만회 구연호공’의 유훈으로 LG가를 상징해온 ‘인화(人和)’는 ‘불화(不和)’로 뒤덮였다.
‘장자승계’를 지켜온 LG가 상속 분쟁에 휘말린 건 올 2월이다. 고 구본무 회장의 미망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이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5년 전 구본무 회장의 별세 후 이뤄진 재산 분할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언장 존재 유무와 같은 법적 쟁점을 떠나 가족이 협의해 마무리한 사안을 다시 꺼낸 데 대해 재계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또 다른 배경이 있는 게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재계의 이러한 시선은 안타깝게도 적중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박태일 부장판사)는 16일 오후 구본무 선대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 씨가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낸 상속회복청구 소송의 2차 변론기일을 열었다.
이날 재판에서는 가족 간 대화를 녹음한 녹취록이 공개됐고, 이 과정에서 상속재산 분쟁의 배경이 세 모녀 측의 ‘경영참여 목적’을 암시하는 증언까지 나왔다.
녹취록에는 김 여사가 “구연경 대표가 잘할 수 있다. 경영권 참여를 위해 지분을 다시 받고 싶다”고 말한 내용과 구연경 대표가 “(구 선대회장의) 유지와 상관없이 분할 합의는 ‘리셋’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또 김 여사가 구광모 회장에게 “내가 주식을 확실히 준다고 했다”고 말하며 사실상 가족 간 합의를 인정하는 내용도 확인됐다.
김 여사 측은 “유언장이 있는 것으로 속아 소송을 제기했다”고 주장했지만, 녹취록을 통해 공개된 내용은 매우 구체적인 재산 분할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또 원고 측이 소송 제기 당시 “경영권 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힌 사실도 180도 달라지게 됐다. 오히려 ‘경영권을 겨냥한 행보였다’는 속마음이 드러난 셈이다.
LG가의 자녀는 많다. 구인회 회장의 형제, 아들 그리고 구자경 회장의 아들 등 형제는 두 손으로도 꼽을 수 없다. 형제가 많다 보니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소지도 다분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꺼낸 카드가 ‘장자승계’다. 이러한 선대회장의 뜻과 그 원칙을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본 장본인이 김 여사다.
증인 심문을 마친 뒤 재판장은 양측에 조정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화’를 강조해온 LG가를 위한 배려이자, LG가의 상속분쟁이 마치 막장드라마와 같은 모습으로 비치지 않길 바람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8년 숙환으로 별세한 고 구본무 회장은 경기 광주시 도척면 화담숲에서 바람과 구름, 나무와 풀이되어 가족을 보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유지를 생각해서라도 원고와 피고가 아닌 가족으로 만나 ‘인화’하길 기대한다.
한형용 기자 je8day@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