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모노크롬 회화는 1970년대 국내 화단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군사 독재정권이란 암울한 시대에 작가들은 저항적 의미보다는 그저 순백의 캔버스 위에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아, 물질계와 정신계가 합일되는 직관적 깨달음을 펼쳤다. 사회 정치적 메시지 덧대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성과 함께 내면 깊이 자리한 자유의 열망을 담아냈다. 작가마다 선택한 한지, 면포, 삼베 등의 재료에 무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물성(物性) 화면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K-모노크롬 회화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 전을 계기로 국내외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단색화’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작고한 윤형근 박서보 조용익을 비롯해 정상화 이우환 하종현 등 기라성 같은 단색화 작가들은 50년 넘게 국내외 화단을 누비며 K-아트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희돈 화백이서울 성북구 뮤지엄 웨이브에 걸린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인연'시리즈를 설명하고 있다. 뮤지엄 웨이브 제공제공 |
1세대 단색화가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1.5세대 대표주자 이희돈 화백이 오는 13일부터 서울 성북구 뮤지엄 웨이브에서 ‘인연, 연(緣)을 그리다’를 주제로 개인전을 시작한다. 캔버스 위에 그물망이나 스테인리스 망을 격자형으로 배열하고 20~30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을 올려 작업한 단색화 30여 점을 건다. 화려한 단색조의 직물이 펼쳐져 있거나 나무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최근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이 화백은 “나는 어떠한 형태도 그리지 않았다. 작은 이미지조차도…”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한 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의 요체로 꼽은 촉각과 정신, 행위는 한 공간에서 겹치거나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지점을 향해 퍼져 나간다.
작가는 “법문을 외듯, 참선을 하듯, 한없이 반복한다는 것은 탈아(脫我)의 경지에 들어서려는 행위의 반복”이라고 설명했다.
이 화백은 1990년대 후반 캔버스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뚫는 타공 기법에 착안해 이를 자신의 조형언어로 채택했다. 닥나무를 빻아 만든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발라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단색화 영역을 개척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세 번이나 입상한 그는 닥나무를 빻아 만든 물감으로 발명 특허도 취득했다. 2015년 부산아트페어에서는 인도의 5대 재력가 베누 스리니바산 TVS모터스그룹 회장(71)이 이 화백의 작품을 반해 대작을 구매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인천 강화군 불은면 고능리 446의 1 일대에 스튜디오를 겸비한 미술관(이희돈뮤지엄)을 짓고 지역 주민들과 문화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메이저화랑인 사치갤러리의 러브콜도 받았다.
이희돈 화백이서울 성북구 뮤지엄 웨이브에 걸린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인연' 시리즈를 설명하고 있다. 뮤지엄 웨이브 제공제공 |
팔순을 앞둔 이 화백은 매일 새벽 5시 산사의 수도승처럼 잠에서 깬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열고 가볍게 몸을 풀고 슬며시 붓을 드는 게 이젠 습관이 됐다. 이른 아침 시작된 작업은 오후 6시를 넘기면서 끝난다. 작업시간에는 전화도 받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작업시간은 온전히 나에게로 향하는 시간입니다. 무엇과도 바꾸거나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고 할 수 있지요.” 작업시간 중간중간에 그는 클래식 음악을 틀거나 팝송으로 처진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화백은 “작품 소재를 주로 불교에서 찾는다”고 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제 작업은 불교적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 서적도 많이 읽었고요. 특히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글귀가 가장 와 닿아서 이것을 평생 화제(畵題)로 삼았죠.”
그는 인다라망의 의미에 대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유기체로 더불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연속입니다. 젊은 시절 길거리와 극장, 공연장, 술자리, 시장 등에서 공교롭게 만난 사람들의 인연을 시각 예술로 표현한 게 벌써 40여년이 됐네요. 불교 교리를 전혀 담지 않은 일반 그림에서도 불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단색화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연(緣)’ 시리즈는 젊은 시절 불교에 대한 경험을 마치 재즈 음악처럼 풀어냈다. 채도가 높은 선과 면, 그물망과 철망의 그림자로 구성된 작품들은 과거 작업보다 한층 관념적이다. 강렬한 색감의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단색화의 힘’을 보여준다. 사실주의 풍경화에서 출발해 이제는 한국 화단에서 당당한 단색화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붓질이 이어질수록 변화하는 그림 맛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색과 선, 무수한 기공의 형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물감과 한지, 그물망 등 미술적 재료를 가지고 인간, 우주, 자연의 무수한 인연을 축조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소니아 홍 뮤지엄웨이브 관장 (우측)과 대화하고 있는 이희돈 화백. 뮤지엄 웨이브 제공 |
“회화란 내적 실재를 발견하는 통로입니다. 가령 화면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붓으로 묵묵히 평면의 정지작업을 해가는 일련의 작업 과정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작업 자체의 수행성이 하나의 목적을 띠고 있는 겁니다.” 10년 전 화방을 아예 접고 그림이 더 ‘고파’ 궁리했던 화가의 끝없는 미술수행이 이제는 현란한 색채와 인연의 흔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전시는 6월1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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