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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감독 도전했으나 고배…여자를 써보기는 했냐고 따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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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4-29 06:00:25   폰트크기 변경      
[인터뷰] 박찬숙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 감독

유리천장 깨자” 인권위에 진정서 제출

“스포츠 팀별 女지도자 1명씩” 얻어내


작년 서대문구에서 첫 지휘봉 잡아

창단 1년 만에 실업농구연맹전 우승


女배구에 밀리는 건 자존심 상해 

박지수ㆍ김단비 같은 선수 배출 

스포츠계ㆍ농구인들 지원 힘써야


지난 3일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난 박찬숙 감독이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농구 코트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 사진 : 안윤수 기자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여자 감독 써보긴 했냐고요.”

지난 3일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난 박찬숙(65) 감독은 다소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박 감독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LA 올림픽 여자 농구 은메달의 주역이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실력이 훨씬 월등하다고 평가받던 캐나다, 유고슬라비아, 호주를 차례대로 이겼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한국은 중국(과거 중공)을 기적적으로 꺾고 69:56의 완승을 이뤄내며 은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올림픽 직전에 열린 프레올림픽에서 중국에게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37:72로 패했던 터라 더욱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농구 역사에서 이날의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84년 LA 올림픽 당시 박찬숙 감독 (왼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 / 사진 : 연합 


이처럼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인 그가 은퇴 이후 원한 건 딱 하나다. 후배들을 키우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것. 그러나 현역 시절 코트 위를 누구보다 훨훨 날던 그도 “은퇴 이후 경기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한 프로 농구단 측의 요청으로 면접에 참여했던 박 감독은 최종 면접에서 “결단력이 없는 여성은 감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 번 써보고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반문도 해봤지만, 여성 감독의 문턱은 한없이 높았다.

이에 박 감독은 2007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당시 진정서를 낸 것은 감독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2007년 6월 11일 국가인권의원회에 박찬숙(가운데) 감독이 여자농구팀 감독 선임과정에서 고용차별을 받았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 사진 : 연합 


박 감독은 “제2, 제3의 여성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자리에 섰다”라며 “후배들이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발판을 닦아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팀 감독으로 임용되진 못했지만 “내가 목소리를 내온 덕분에 이후 한국 농구계의 유리천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인권위는 스포츠 구단에 팀 내 코치를 비롯한 지도자는 여성을 1명 이상 둘 것을 권고했다.


분명한 변화도 있었다. 2012년 이옥자 감독이 KDB생명에서 첫 여성 감독을 맡았고, 뒤이어 유영주 감독이 2019년 BNK썸의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최근 WKBL에서도 여자 지도자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박정은 감독은 BNK썸을 지휘하고 있고,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전주원 우리은행 코치가 여자농구 최초의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지난 3일 대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박찬숙 감독은 “서대문구청 여자 농구단 선수들이 프로에 진입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은 훈련하는 선수들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찬숙 감독. / 사진 : 안윤수 기자  


그리고 박 감독 역시 지휘봉을 잡았다. 박 감독은 지난해 3월 창단한 실업 농구 서대문구청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했다.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김천시청, 사천시청, 대구시체육회, 서울시 농구협회에 이은 국내 5번째 여자 실업팀이다.

박 감독은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었던 만큼 선수들과 함께하는 매일이 꿈만 같다”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창단 첫 해 8명으로 시작했던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올해 4명의 선수를 더 영입해 12명의 완전체를 꾸렸다. 박 감독의 말을 빌리면 소속 선수들은 저마다 “상처받고, 좌절을 겪은” 경험이 있다. 프로 진입에 실패하거나, 의지와는 다르게 조기 은퇴한 선수 등 모두 쉽지 않은 과정들을 거치다 이곳에 들어왔다.

코트 위에서의 순간이 누구보다 간절한 선수들이 모여 있기에 박 감독은 “이들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다”라며 “농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곳에서만큼은 마음껏 농구를 할 기회를 주고 싶다”라고 다짐했다.


지난 14일 박찬숙 감독이 경북 김천시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4 전국실업농구연맹전 마지막 날 경기에서 서대문구청 여자 농구단 선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 사진 : 서대문구 제공


이를 위해 그는 현재 모든 열정을 선수들에게 쏟고 있다. 매일 아침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이뤄지는 체력 훈련도 되도록 함께한다. 창단 초반에는 선수들과 호흡을 빠르게 맞추기 위해 선수들의 숙소에서 함께 먹고 자며 생활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열정과 애정이 넘치는 탓에 계속 같이 지내고 싶었지만, 딸이 선수들은 집 가서도 상사와 함께 있는 느낌일 것이라며 말렸다”며 “대신 훈련소 근처로 이사를 왔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박 감독에겐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손경원 코치도 있다. 손 코치는 전 삼성생명 특급 가드로, 1994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박 감독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선수들의 세심한 부분까지 손 코치가 살뜰히 챙기며 팀에서 시너지를 일으킨다.

선수들 말을 빌리면 박 감독은 농구단에서 ‘바라만 봐도 힘을 얻는 존재’다. 박 감독은 훈련하면서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마다 “지금 너네 겪었던 거 나도 똑같이 겪었어. 나를 믿고 따라오면 분명히 이길 수 있어”라고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넨다.

박 감독은 “선수들을 키워서 프로팀에 보내는 것이 감독으로서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선수들이 실업팀을 넘어 더 넓은 무대에서 각광받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구단주인 이성헌 서대문구청장도 박 감독과 의지를 같이 했다. 박 감독은 “구가 선수들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프로로 가는 게 아쉬울 수도 있는데도, 이 구청장님은 선수들이 꿈을 펼치고, 장기적으로 서대문구가 여성 스포츠의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뜻을 함께하고 계신다”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 박 감독은 “여자 농구 전성 시대가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라는 개인적인 염원을 전했다. 박 감독이 활동했던 80~90년대 여자 농구는 태릉선수촌에서 모든 종목을 통틀어서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였다. 국제대회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내며 국민들에게 가장 큰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현재는 5개에 불과한 실업팀도 당시에는 13개나 됐고, 초중고 농구팀이 50개가 넘었다. 박 감독은 “아직도 여자 농구하면 박찬숙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게 한편으론 슬프다”라며 “여자 배구에게 밀리는 걸 보면서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미국 프로농구(WNBA)에서도 뛰었던 ‘국보 센터’ 박지수 선수KB국민은행)나 베테랑 김단비(우리은행) 선수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스포츠계와 농구인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라고 부탁했다.



◇ “박찬숙도 울고, 구청장도 울었다”…서대문구 ‘2024 전국실업농구연맹전’ 첫 우승


지난 14일 서대문구청과 김천시청과의 경기의 한 장면. 이날 서대문구청은 막판 공세로 47대46 역전승을 하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 사진 : 서대문구청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부저 소리와 함께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지난 14일 서대문구청은 47:46으로 김천시청을 극적으로 꺾고 ‘2024 전국실업농구연맹전’에서 우승했다.

3쿼터 막판까지 11점 차로 끌려다니며 패색이 짙었지만, 선수들은 끝까지 박찬숙 감독의 지도 아래 희망을 잃지 않았다. 4쿼터가 시작하자 서대문구청은 15점을 올리고, 경기 막판 8점을 몰아넣었다.


특히 서대문구청 주 득점원인 윤나리 선수가 벼락같은 3점 슛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1점 차이로 추격했다. 마지막 57.2초를 남기고 박은서 선수가 골밑 득점을 성공시키면서 극적으로 역전승했다.

창단 1년 만에 우승을 일궈낸 박 감독은 경기 직후 눈물을 글썽이며“너무나 큰 영광이며 기쁘고 감사하다”라며 “이번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매 대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매 경기에 참석해 구민들과 열렬한 응원을 했던 이성헌 서대문구청장도 이날 감격의 눈물을 보였다. 이 구청장은 “‘하면 된다’는 희망을 선사한 농구단에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선수들도 벅찬 감동과 함께 박 감독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센터 김해지(27) 선수는 “먼저 손 내밀고 다시 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박 감독님과 서대문구 덕분에 가슴 벅찬 경험을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번 대회 최우수선수(MVP)이자 주장인 윤나리(35) 선수도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신 감독님 덕분에 제 2의 농구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 감독과 선수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올해 이어지는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대회,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 가면 지금도 땀 흘리는 선수들과 박 감독을 만날 수 있다. 농구공이 코트 바닥을 때리고, 농구화 밑창이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그들을 응원하는 박수소리처럼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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