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Memory &] 한남3구역 이주민들은 무엇을 남겼을까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4-07-23 06:00:24   폰트크기 변경      
사라지는 마을에 대한 기억과 기록

“보광동은 다같이 어우려져 살던 곳”

1950년대 후반 공동묘지로 쓰이다

전국 팔도 피난민들 몰려와 생활 


외국인ㆍ성수소자도 어우러져 

2003년 뉴타운 지정 후 20년 걸려 

이주율 95%…철거 시작 ‘코 앞’


보광동의 ‘추억, 그리고 역사’ 등 

연극ㆍ공유화ㆍ논픽션으로 표현



서울 용산구 보광동 (한남뉴타운 한남3구역) 전경. / 사진 : 안윤수 기자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서울은 빠르게 발전해왔다. 고층빌딩과 아파트로 채워진 도시다.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곳도 남아 있지만, 이 역시 하나둘 사라질 운명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좁은 골목과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집들, 늘어나는 빈집들을 보존이라는 이유로 방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동네를 그대로 잊기도 아쉽다. 정비와 개발을 목전에 두고 곧 지워질 옛 동네들. 그곳에 살았던 사람과 기억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사를 아예 가지 않은 건 아니야. 딸이 자기네 집으로 오라 그래서 갔는데, 도저히 그곳에선 잠이 오질 않더라고. 이 동네 고양이도 자꾸 생각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났는지도 궁금하고.”

습기가 막 짙어지는 지난 7월 초입, 서울 용산구 보광동. 가림막 없이 저층주택만 오밀조밀 모인 탓에 거리에는 섬광처럼 햇볕이 쏟아졌다. 보광동은 폐허였다.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벌레가 허물을 벗어놓은 듯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 7월 초 기자가 찾은 보광동은 폐허 그 자체였다. / 사진 : 박호수 기자 


쓰레기 더미 사이를 걷는 동안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주택에서 미세한 빛과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니 건물 밖으로 박모(83)씨가 나왔다.


그는 1960년 이후 한 번도 이 동네를 떠난 적이 없는 보광동 토박이다. 자신이 이곳에 계속 있다는 사실이 기사에 나가면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냐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동네야. 오르막길이라 다리 아프지, 허구한 날 외국인들끼리 싸워서 시끄럽지, 낡았지.”

그러면서도 그는 보광동을 “차별 없는 동네”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은 누굴 봐도 흉보지 않았어. 우리 딸 집 가니깐 자꾸 노인네 다리 절고, 피부에 뭐 났다고 피하는 것 같아서 아파트 단지 돌아다니는데 눈치가 보이더라고.” 이곳에 미련이 남는 이유에 대해 그는 “편해서. 하도 별의별 사람들이 같이 살아서 그런가, 다들 편견이 없이 지냈어”라고 기억했다.



달동네에서 고층아파트로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 이주기간에 한창 이사를 준비중인 주민들의 모습. / 사진 : 크리스 민 제공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보광동은 가파른 언덕길에 노후주택이 밀집한 전형적인 ‘달동네’다. 2003년 뉴타운 얘기가 처음 나온 이후 약 20년이 지나고서야 이주가 시작됐다. 현재 이주율은 95.26%다.

가난의 대명사였던 보광동은 재개발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처럼 통용되는 ‘한남’이라는 새 이름으로 두 번째 삶을 살게 된다. 한강변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만큼 이에 걸맞은 몸값도 자랑하게 될 것이다. 하루아침에 ‘밑바닥’에서 최정점으로의 신분 상승이니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만 사둘 걸’이라며 미련 남은 곁눈질로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 보광동 곳곳에는 이주민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들이 벌레가 허물 벗어 놓은 듯 널브러져 있었다. 옷, 책장, 냉장고, 의자 등 누군가의 손길이 탔던 물건들처럼 보였지만 그마저도 이미 시간이 지나 부패하고 있었다. / 사진 : 크리스 민 제공 


‘널리 빛나는 마을’ 보광(普光). 1950년대 후반 공동묘지로 쓰이던 곳을 피난민을 위한 택지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이후 전쟁의 상흔을 지닌 미군 막사 ‘하우스보이’에서부터 성소수자, 외국인까지 모여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당연하게 살 수 있는 동네”였다.


이곳 주민들은 값싼 월세를 찾아 보광동에 삶의 터를 잡은 이태원 성소수자 클럽 직원인 트렌스젠더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발이 큰’ 그녀들을 위한 전문 신발가게도 있었고, 이웃 아주머니들과 함께 ‘언니 동생’하며 사우나에 가기도 했다.


대학시절 지방에서 올라와 보광동에 월세를 얻어 올해 3월까지 꼬박 8년을 살았다는 권재민씨는 “흑인 곱슬머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사이로 반짝이는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180㎝의 (트랜스젠더) 언니들이 지나가고,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어르신들이 있는 동네”라고 표현했다. 권씨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이제 서울에서 이토록 값싼 가격으로 누가 이런 공동체를 받아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기억했다. 


“잊지 않을 거예요”


이제는 이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보광동 마을을 걷고 있는 주민들 / 사진 : 크리스 민 제공


철거 직전까지 낡은 투룸에 살았다는 예술가 장차림씨는 “돈이 생기면 모아서 짜장면 사주던 노숙자 삼촌, 내 집 불이 들어와야 마음이 편하시다는 마을 어르신들, 누가 시비 걸었다니깐 가게 문 연 채로 달려왔던 중국인 삼촌들까지. 2000년에 이사 온 이후 나의 청춘을 함께했던 이곳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연출가이자 배우인 남선희씨는 2019년 보광동으로 이사 오는 날 눈물을 흘렸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동네에 사는 것도 처음이었고, 셰어하우스여서 온전한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침대와 행거를 놓고 나니 그의 방에 남은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 동네에 매료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기했어요. 다양한 세대와 인종이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종종 농담처럼 친구들에게 보광동 골목이 다 같은 거 같아도 인종마다 선호하는 골목이 있고, 어느 순간 나도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골목으로 다닌다고 말했어요. 배척하거나 배제하진 않지만 자신들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곳입니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한남3구역 이주 완료 건물에 출입금지 안내문이 연이어 붙어 있다. / 사진: 안윤수 기자


그는 동네 다문화 아이에게 “어디에서 왔어?”라고 물으면 아이들이 정색하면서 “여기서 태어났는데요”라고 대답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너무나 당연하게 피부색으로 이방인으로 규정했다는 게 부끄러웠죠.” 남씨에 따르면 다문화 가족들은 색안경 낀 시선을 피해 이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보광동 베이비’들이 태어났다.

10년, 20년 뒤 이곳의 흔적이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다같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당연했던, 그렇게 살았던 존재들은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기록ㆍ기억하는 작업들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에 버려진 냉장고. / 사진 : 최도아 제공


“골목에 버려진 냉장고를 보며 이 공간에서 다양한 존재들을 품던 존재가 버려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남 제3구역이, 보광동, 한남동, 이태원동이 냉장고 같았어요. 낡은 냉장고 한 대가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 나 같은 예술가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썩지 않게 같이 잘 보관했구나.”

남씨는 ‘한남 제3구역 : 재개발을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연출했다. 그는 이곳 주거환경이 열악한 만큼 재개발이 시급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난해 재개발조합의 ‘지주 및 건물주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현수막 문구를 보자 정작 동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세입자들은 재개발 논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남씨는 그때부터 보광동의 ‘사라져가는 이들’을 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과 공유회는 현재까지 13번 진행됐다. 작년에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대상에 선정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관객들과 한남3구역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배우 남도희씨 모습. / 사진 : 최도아 제공 


보광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김여정 작가는 이곳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을 발간했다. 작가가 그린 보광동 또한 ‘소외된 이들을 품어온’ 곳이었다.

김 작가는 전쟁의 상흔이 가슴에 남겨진 보광동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전했다. 이곳 어르신들은 매년 10월 한강불꽃축제가 열리면 다 같이 피난이라도 가듯 동네를 떠났다. 폭죽 소리가 유엔군이 남산과 보광동 언덕에 포진한 인민군을 향해 연일 집중 포격을 가했던 그날의 공포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보광동은 그렇게 한국사의 아픈 단면도 담고 있다.

7월부터 SNS와 지인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은 “그 동네 한 번 살아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떠나고 빈집만 남았다. 하지만 편견없이 함께 살았던 보광동은 사람들의 기록과 기억에 남아 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프로필 이미지
정치사회부
박호수 기자
lake806@dnews.co.kr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