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이승윤 기자] 고객이 보험계약 과정에서 ‘위험 직업’을 숨긴 사실을 보험사가 뒤늦게 알았더라도 상법상 ‘통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보험계약을 맺을 때 중요한 사항을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는 ‘고지의무 위반’일 수는 있지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이미 지났을 뿐만 아니라, 계약 기간 중에 직업을 바꾸지 않았다면 통지의무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진: 대법원 제공 |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A씨의 유족들이 메리츠화재해상보험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9일 밝혔다.
A씨와 그의 배우자는 2009년과 2011년, 2016년 메리츠화재와 A씨를 피보험자로 하는 보험계약 3건을 맺었다.
A씨는 보험 가입 전부터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했지만, 보험계약 청약서에는 직업을 ‘사무원’이나 ‘건설업 대표’, ‘경영지원 사무직 관리자’ 등으로 적었다. 실제 직업보다 사고 발생 위험이 낮은 직업으로 속인 셈이다. A씨는 계약 체결 이후에도 실제 직업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험사에 알리지 않았다.
문제는 2021년 7월 A씨가 공사현장에서 작업 도중 1층에서 지하 1층으로 떨어져 숨지면서 시작됐다. A씨의 유족들은 보험금 2억여원을 청구했지만, 보험사가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의 알릴 의무 위반으로 각 보험계약을 해지하고 보험금은 지급하지 않는다’고 통보하자 소송에 나섰다.
재판 과정에서 보험사 측은 “A씨가 고지된 직업과 다른 직종에 종사해 보험사고 위험성이 증가했는데도 계약 체결 이후에 이를 고지하지 않은 것은 상법상 통지의무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상법 제652조 1항은 보험기간 중에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가 사고 발생 위험이 늘어난 사실을 알게 되면 지체없이 보험자에게 통지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게을리하면 보험자가 그 사실을 안 날부터 1달 안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1ㆍ2심은 “보험계약 기간 중 실제 직업이 변경되지 않았다면 보험사에 고지된 직업과 다르더라도 상법상 통지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며 A씨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상법에서 통지의무 대상으로 규정한 ‘사고 발생 위험의 변경ㆍ증가’는 보험기간 중에 발생한 것으로 한정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사 측은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보험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기간(3년)이 이미 지난 상태였다. 상법 제651조는 보험계약 당시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가 고의ㆍ중대한 과실로 중요한 사항을 고지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고지한 경우 보험자가 그 사실을 안 날부터 1달 안에, 계약을 체결한 날부터 3년 안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보험사 측은 상고했지만, 대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은 “상법 제651조의 고지의무는 중요한 사실이 보험계약 성립 시에 존재하는 경우에 발생하고, 상법 제652조의 통지의무는 보험계약 성립 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보험기간 중에 사고발생의 위험이 새롭게 변경ㆍ증가된 경우에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지의무를 위반함으로써 보험계약 성립 시 고지된 위험과 보험기간 중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된 위험에 차이가 생기게 됐다는 사정만으로는 보험기간 중 사고발생의 위험이 새롭게 변경ㆍ증가됐다고 할 수 없다”며 “이 경우 보험자는 상법 제651조의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있어도 상법 제652조의 통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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