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메밀꽃 |
메밀(Buckwheat). 낱알은 거무튀튀하지만, 그 밭은 다르다. 이제 곧 천지에 순백의 소금 같은 꽃잎을 가득 틔울 테다. 바야흐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사실 수확은 아직 멀었다. 메밀을 거두는 시기는 적어도 늦가을, 제주도는 초겨울이다. 이때 거둬들인 메밀을 감히 누가 이듬해 여름까지 남겨놓을 수 있었을까. ‘잉여’ 식품이 거의 없던 시절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냉면이니 막국수는 겨울에나 먹을 수 있던 음식이라 한다.(동치미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메밀꽃 필 무렵에 가산(可山) 이효석의 글이 달빛처럼 흐뭇하게 스쳐 지나간, 굵은 소금을 흩뿌린 듯 새하얀 평창의 그 밭이 기다리고 있다. 휘영청 달이 가득 차올랐을 때를 맞춰 가야 한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을 앞두고 순백의 서막이 열리는 것. 갑자기 도망치듯 여름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평창에 젖니처럼 희고 자그마한 꽃망울이 툭툭 터지고야 만다. 습하고 묵직한 여름을 밀어낸 청량한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봉평 푸른 들을 온통 뒤덮는다. 이 작은 꽃이 피고 지어야 메밀이 영근다. 아름다운 꽃의 결실은 구수한 메밀이다.
삼교리동치미막국수 메밀전병과 곁들여먹기 |
괜스레 메밀꽃을 보고 나면 바로 메밀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의 초입이니 먹을 것도 천지다. 우선 메밀꽃 축제(효석문화제)를 여는 덕분인지 잘한다는 막국수집이 잔뜩 모여 있다.
싱그러운 메밀향 가득한 면발을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양념에 매매 비벼 후루룩 빨아내면 그 맛이 아주 좋다. 적당히 먹다가 중간에 머리통까지 ‘쩡’해지는 육수를 부어 말아 먹으면 만족감이 배로 든다.
막국수는 강원도를 비롯해 강원권에 접한 경기도 일부에서 먹던 메밀국수를 뜻한다. 집에서 분틀(국수틀)로 뽑아 만들어 먹던 음식이니 조리법이야 가가호호 각양각색이다. 원래는 물 막국수, 비빔 막국수 구별도 없다. 동치미 국물이나 육수에 자작하게 말아 김치를 얹거나 오이, 가지 등 여름 채소를 올려 양념장이나 들기름에 쓱쓱 비벼 먹는 게 일반적이다. 물 막국수란 여기다 시원한 우물물을 부어 후루룩 마시는 것이다.
범부막국수 |
한국어문교육연구회가 2017년 펴낸 ‘음식명에 붙는 접두사 막에 대하여’(이병기 저)에 따르면 막국수 이름은 ‘막(Justㆍ금방 만들어 먹는)’ 국수에서 나왔다. 설렁설렁, 막 만들었다는 ‘막’이 아니다. 쌈을 싸먹는 데 쓰는 막장도 그렇다. 오래 숙성시켜 간장을 빼지 않고 메줏덩이를 바로 갈아 이레에서 열흘 정도 익혀 만드는 ‘속성’이라 막장이라 불렀다. 막걸리도 같은 유래다.
분틀에 눌러 메밀국수 가락을 뽑고 육수에 말아내는 음식, 막국수는 냉면의 한 형태다. 아니 냉면이 막국수의 한 갈래일지도 모른다. 평양냉면도 원래는 그저 국수라 불렀다고 한다. 한자 쓰기 좋아하는 이들이 냉면(冷麵)이란 이름을 붙였다.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냉면, 좀 더 투박하고 서민적인 냉면이 막국수인 것이다.
미가연막국수 메밀전 |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도 메밀로 소바를 만들어 먹었다. ‘소바(そばㆍ蕎麦)’는 원래 국수가 아니라 ‘메밀’이라는 뜻이다. 메밀을 빻아 우리네 막국수처럼 면을 만들어 먹던 것이 아예 국수 요리의 이름으로 굳었다.
한일 양국 모두 밀을 재배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심어 먹던 구황작물 메밀이 이처럼 훌륭한 식재료가 됐다.
메밀총떡 |
어여쁜 꽃 지고 얻어낸 메밀일 텐데 어찌 국수만 뽑아 먹을까. 메밀 부꾸미, 메밀 전병(총떡), 메밀묵밥 등 쌉쌀하고 구수한 메밀 향기가 가득한 토속 음식들이 식욕을 자극한다.
메밀묵은 도토리묵과 식감과 맛이 많이 다르다. 겨울철 장사치들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메밀묵 사려∼ 찹쌀떡!”을 외치는 기믹으로 유명한 메밀묵은 구수한 특유의 향이 좋다. 도토리묵과는 달리 조직이 성글어 푸석하니 젓가락으로 집자면 툭툭 잘리고 만다.
요즘은 냉면과 막국수처럼 메밀 특유의 거친 식감과 향을 즐기려 메밀묵을 찾는 이들이 많다. 메밀값이 비싼 터라 도토리묵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 묵국에 밥을 말아 먹는 메밀묵밥이 지역 별미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영주시와 예천군 등 경북 지방이 유명하다.
메밀전병 |
김치와 돼지고기, 묵을 넣고 볶다가 끓이는 경북 예천식 향토음식 ‘태평추’도 있다. 시인 안도현은 태평추는 궁중음식 탕평채가 서민들에게 전해지며 이름과 형식이 와전됐다 설명한다.
벌써 가을꽃 소식이 반갑다는 괜한 핑계가 생긴 덕에, 일부러 찾아 먹기에 좋은 메밀 음식점을 두루 소개한다.
미가연막국수 |
◇미가연막국수=평창, 그것도 봉평. 메밀밭 인근에서 맛보는 막국수가 일품인 집이다. 따로 제분기와 제면기를 두고 그날그날 말아내는 100% 순면 면발이 가히 최강급이다. 강원도식으로 비벼 먹다가 육수를 부어, 발우공양하듯 싹 비우면 된다. 모든 메뉴에 메밀싹을 수북이 얹어준다. 항산화 물질인 루틴 함량이 더 많은 쓴 메밀을 사용하거나 육회를 올려내는 막국수도 있다. 강원 평창군 봉평면 기풍로 108.
범부막국수 |
◇범부메밀국수=양양하면 바다로 알고 있지만 내륙 범부리에 유명한 막국수집이 있다. 해바라기씨 등 견과류와 김가루를 수북이 얹어주는 국숫집으로 어찌 알고 점심때마다 주차장이 가득 찬다. 두꺼운 순메밀 면발은 씹을수록 담백하고 구수한 향이 나고 비빔양념이나 육수 역시 향토 색채가 확 풍긴다. 비빔국수를 먹다 육수를 부으면 두 가지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보들보들한 메밀전을 찢어 국수를 싸먹으면 향이 더하다. 강원 양양군 서면 고인돌길 6.
영주 순흥전통묵집 |
◇메밀묵밥=순흥전통묵집. 묵은 경북에서 많이 먹는데, 특히 영주시는 묵에 특화된 도시. 순흥에 묵밥집이 많다. 멸치장국에 메밀묵을 썰어 넣고 밥을 말아 먹는 묵밥,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맛이 훌륭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슴슴한 듯한 국물에 직접 쑨 메밀묵의 구수한 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39번길 21.
삼교리막국수 |
◇강릉삼교리막국수=심심하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맛있어 그 자체로도 막국수의 전형으로 꼽히는 집이다. 슬러시처럼 살짝 얼린 동치미를 따로 내주면 알아서 국수에 끼얹어 먹으면 된다. 정석대로 특별히 강한 맛은 들지 않았지만 상쾌한 동치미 국물 속에 잠긴 무는 정말 맛있다. 순도 높은 굵은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인 후 아삭한 무를 한입씩 베어 물면 달곰하고 구수한 향이 서로 섞여들며 행복감을 남긴다. 얇고 투박하게 부쳐낸 메밀전과도 궁합이 좋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로 38.
고기리막국수 |
◇고기리막국수=휴일 평일 할 것 없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며 막국수계의 지존으로 꼽히는 집. 깔끔한 육수와 고함량 메밀의 구수한 면발로 소재지인 용인은 물론, 수도권을 휘어잡았다. 폭신하고 촉촉한 수육에 더해 청량감을 만끽할 수 있는 딱 적당한 온도의 막국수 한 그릇을 위해 먼 길과 긴 대기시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집. 경기 용인시 수지구 이종무로 157.
공주 춘산막국수 |
◇춘산메밀꽃=충남 공주시에 있지만 막국수를 파는 아주 유명한 집이다. 모양새나 담음새는 그리 특별할 것 없다. 특별한 제면과 양념을 강조하는 몇 집을 제외하고 강원도권이나 수도권 국숫집에서 내는 막국수는 대부분 그리 생겼다. 얼룩박이 메밀 면에다 김 가루에 참깨에 메밀 싹까지. 맛은 다르다. 투박한 메밀국수가 차가운 육수를 품고 있다. 육수의 육향도, 꽤 화끈한 양념장도 모두 좋다. 반쯤 먹다 물국수로 먹도록 차가운 살얼음 육수를 따로 준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금벽로 1336.
글ㆍ사진=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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