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산세가 마치 ‘색무(色舞)’처럼 펼쳐진다. 산이 우주가 되고, 우주가 산이 되는 경지를 꿰뚫은 예술가의 강건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원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화면은 희미한 선과 어우러져 야생의 뜨거움으로 번지며 숭고미를 만든다. 1세대 서양화가 고(故) 유영국(1916~2002)의 1967년 작 ‘Work’이다.
유 화백의 화풍은 처음부터 끝까지 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산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평생 우리 고유의 넉넉한 산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주위에 온통 산뿐인 고향 경북 울진의 풍경을 모태로 1955년 ‘산이 있는 그림’을 처음 선보이면서 대자연의 복합적인 조형요소를 단일화하는 데 집중했다.
유영국의 1967년 작 ‘Work’. 사진=PKM갤러리 제공 |
산에 열광하면서 그 영혼을 화폭에 담아낸 유영국의 회화 세계를 재조명할 기회가 찾아왔다. 1950년대∼1980년대 그의 예술적 궤적을 추적하는 기획전 '유영국의 자연-내면의 시선으로'가 21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막을 올린다. 1950년대 초기 작품부터 1980년대 색면 추상화의 길로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산을 모티브로 작업한 ‘Work’ 시리즈 등 34점을 마주하며 작가의 예술적 위상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유화 34점 중 21점이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유족들이 소장해온 작품들이다.
유영국의 둘째 딸 유자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는 "소품의 완성도가 높지만 미술애호가들은 소품이다보니 너무 싸게 구입하려 했다"면서 "그러나 아버지가 작품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기는 것은 아니라며 아예 팔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것을 이번 전시회에 처음 내보이게 됐다"고 강조했다.
유영국의 예술적 궤적은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한 몸이다. 그는 일제시대의 서구의 모방 미학을 뛰어넘어 해방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아젠다’를 세웠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1935년 도쿄문화학원에서 공부한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벽’을 뚫고 1950년대 한국의 새로운 미학 세계를 개척했다. 1950년대 후반 한묵, 황염수, 이규상, 박고석과 함께 ‘모던아트협회’를 창립한 유영국은 판에 박은 듯한 사실주의 일변도에 염증을 느껴 추상미술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울 약수동의 적산가옥에 살면서도 ‘가슴으로 산을 맞이하는 화가’의 삶을 견지했다.
그의 일상을 지켜본 딸 자야씨는 “아버지는 산이 좋아서 산의 영혼과 흔적을 찾아 ‘산의 화가’로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장식의 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유영국은 산을 통해 동양 정신의 매듭을 잇고, 거기서 얻어진 화면은 성악보다 우렁찬 생동감으로 되살렸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산을 그린다기보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동양정신을 산을 통해 불러냈다는 얘기다.
유영국의 1974년 작 ‘Work’. 사진=PKM갤러리 제공 |
전시장에는 형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스스로 택한 자유주의 미학 속에 오로지 ‘산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을 화폭에 풀어낸 소품들이 관람객을 손짓한다. 소품에서도 주로 산을 모티프 삼아 자연을 선과 면, 색채의 조합으로 그린 유영국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1974년에 완성한 ‘work’는 고향에서 보던 산을 강렬한 색채로 화폭에 옮긴 작품이다. 빨강 노랑 녹색의 대비, 기하학적 구성이 흥미진진하다. 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내부에 숨어 있는 자연의 근원을 표현했다. 산의 이미지들이 서로 강렬한 색감으로 조응하며 화음을 변주하는 듯하다. 구도와 색감이 원만하고 막힌 데가 없어 절대미까지 느껴진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유 화백이 자연의 생동감을 전달하려는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은 색의 호흡과 터치와 같은 ‘색체의 리듬’"이라며 " 소품에서도 산을 통해 순수하고 초월적인 정신을 열어젖힌 한국 추상주의 미술의 희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몇년간 유영국의 미학세계는 해외 미술시장에도 급속히 번져나가고 있다. 지난해 페이스갤러리의 뉴욕 지점에서 해외 첫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올해는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축제인 베네치아비엔날레에 맞춰 베네치아에서 유럽 첫 개인전을 갖는다. 비엔날레 주최 측의 공식 승인을 받은 병행 전시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기대된다. 전시는 10월10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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