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일제 강점기 시대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답변하면서 인사청문회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 있느냐”라는 그의 말에 논리가 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가 ‘원천적 무효’라는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에서 벗어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인이 됐다’라고 한다면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앞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역시 ‘일본 국적’ 발언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유사시에 한반도에 자위대가 개입해야 한다’거나 ‘이완용에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는 등 윤석열 정부 주요 인사들의 과거 발언들도 소환됐다. 그러자 현 정부 인사에 대한 비판에 ‘뉴라이트’, ‘친일파’, 심지어 ‘밀정’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했다. 인사청문회에서는 역사관 검증이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야당 의원들과의 감정싸움 탓이라고 하더라도 선을 넘는 모습들이 눈살이 찌푸리게 했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은 ‘(올해가) 몇 회 광복절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논쟁적 사안이라 답변할 수 없다”라고 했다. 김 관장은 ‘1945년 광복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독립기념관장 후보자가 광복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은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북한의 남침 여부에 대해 답변을 유보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무 감각이 모자랄 뿐 아니라 도대체 무슨 신념을 지키려고 독립운동하듯이 결연하게 맞서는지 머릿속이 궁금했다. 혹시 이런 발언을 하는 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대통령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는 걸까.
다시 국적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파리올림픽 유도 은메달과 동메달리스트 허미미 선수는 지난달 6일 대구 군위군에 있는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추모기적비를 찾아 메달을 바쳤다. 그는 허석 선생의 5대손이다. 재일교포3세인 허 선수는 할머니의 생전 뜻에 따라 한국 국적을 선택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반대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던 전 국가대표가 훈장을 반납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 일도 있었다. 1999년 화성 씨랜드 참사로 아이를 잃은 후 사고 대처와 보상금 논란에 환멸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국적은 선택되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잊을만하면 현대사 논쟁이 반복되는데 이번 국적 논란 역시 새로운 버전일 뿐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그 속에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빠져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일합방을 알리는 방이 붙자 일진회 회원들은 그 앞에서 목청 높여 만세를 불렀다. 창씨개명은 일부 ‘조선인’들이 먼저 요구했다고 한다. 완벽한 일본인이 되기 위한 절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선택을 한 이들도 많았다. 의병을 조직해 싸웠다. 일제를 피해서 혹은 독립운동을 하려고 조국 땅을 떠났다. 국내에 남은 백성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3ㆍ1운동을 벌였다. 이들을 ‘국적상으로는 일본인’이라고 굳이 정의하는 것이 조롱과 모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 때의 국적이 이제 와서 논쟁거리가 되는 상황이 기괴하다. 지금 무엇이라고 정의해도 당시 그들의 선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역사와 학문적 영역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 아닐까. 과거는 현재에 되묻는다. 역사의 격랑을 만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
김정석 정치사회부장 j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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