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인의 혼을 담아 빚은 백자는 둥실하고 풍만한 어머니의 뽀얀 살결 같은 푸근함이 매력적이다. 설백색(雪白色)의 우아한 품격과 실용성이 특징이다. 하얀 달덩이처럼 미소를 뿜어내는 달항아리는 괜스레 안아보고 싶어진다. 조선시대 백자 그릇이나 도자기 역시 도공들의 집념과 열정이 아우라처럼 따라 붙는다. 500여년 역사의 숨결과 함께 절제된 선과 담백하고 고풍스러운 도자 미학은 이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이런 조선시대 도자기를 공통분모로 50대 인기작가 박성민과 중견 도예가 강민수가 똘똘 뭉쳤다. 서울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 지난 3일 시작한 ‘도자이상(圖瓷二想), 도자기와 그림에 대한 두 생각’전은 옛 백자를 친구 삼아 화폭에 껴안은 화가와 달항아리의 넉넉한 미학을 재현하며 숨가쁘게 달려온 도예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리다.
2~3층 전시장을 꽉 채운 30여점의 그림과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도자예술의 아름다움을 재현해낼 뿐만 아니라 이를 매개로 인간의 삶과 인연에 대한 본질을 탐구한 근작이다. 특유의 백자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되살려낸 그림과 엷은 회색 빛을 머금은 달항아리가 서로 마주하며 묘한 기운을 뿜어낸다. 도자기를 매개로 두 작가의 서로 다른 관점의 조형론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성민 씨가 백자의 아름다움을 색면 추상으로 되살련낸 작품 '커넥트'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아이프미술경영 제공 |
◆박성민이 색면 추상으로 되살린 백자미학
4일 전시장에서 만난 박성민 씨는 “조선 백자의 오묘함에 빠져 몸부림친 지난 5년의 세월을 생각해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백자의 밝은 에너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도공의 예술혼까지 잡아내려 애썼다”고 말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박씨는 한동안 얼음 속에 박힌 식물를 화면에 재현해 내는 ‘아이스캡슐(Ice Capsule)’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스캡슐을 주제로 극사실주의 미학에 천착했지만 40대 후반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면서 화풍의 전환을 시도했다. 백자가 갖는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흑과 백 혹은 회백색과 진백색 등 두 개의 색면으로 응축해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붓을 들어 귀 닫고 입 막은 채 묵묵히 붓질을 하며 도공의 마음까지 화면에 녹여냈다. 화실 가운데 덩그랗게 놓인 도자기를 붓으로 그리고, 닦고, 지우고를 수 천번. 대상의 느낌과 공간에 주안점을 두고 극도의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면서 회화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반복된 붓질 언저리에는 도자기 모습은 사라지고, 화면 깊숙이 고즈넉한 색면추상이 똬리를 틀었다.
박씨는 이런 자신의 작품을 “백자가 담고 있는 속성과 역사성, 처음 본 순간의 인사이트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지배한 극사실주의가 안겨준 일말의 허무감을 극복하려 새로운 방식을 찾았다”는 그는 색면추상 작업에 매일 10시간 이상을 시름하며 보낸다. 결과물이야 어떠튼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다. 그는 요즘 작품의 자양분을 채집하려 박물관을 자주 찾아 나선다. 조선시대 당항아리에 빠져들거나 청화백자의 제작 과정에 귀를 기울인다. 거기서 느낀 감흥과 생기를 시적 운율과 음악적 리듬으로 풀어낸다.
도자의 속성과 역사성에 사색과 명상의 여운이 더해진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자아와 시간, 공간, 촉각(붓질)의 관계로 읽혀진다. 박씨가 최근 5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한 작품 제목을 ‘커넥트’로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성을 지향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세울 수 있다”며 “오래되고 진지한 역사적 사물을 색채미학으로 대체시키면서 자아, 시간, 공간, 시간을 연결하려는 탐색”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주제는 같아도 작품은 조금씩 다르다. 엄격한 기하학적 패턴을 고수한 그의 작품은 최근들어 색면이 서로 겹치며 다채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마치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화면은 그렇게 떠 있다. 수십 년 세월을 갈고 닦은 그의 붓질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박씨는 “김환기와 도상봉 화백이 평생 도자기에 반해 그림 소재로 즐겨 활용했다면 저는 시를 쓰는 마음으로 조선 도공의 꿈과 땀, 눈물까지 되살리려 애썼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씨의 도자기 추상들은 볼수록 온기가 느껴진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겪은 사람에게 풍기는 단순한 멋이라고나 할까. 진정한 모노크롬(단색화)은 조선백자가 아닐까 싶다.
도예가 강민수 씨가 자신이 제작한 달항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아이프미술경영제공 |
◆도예가 강민수의 달항아리 재현 30년
박성민의 도자기 회화가 모노크롬을 지향했다면 강민수의 달항아리 백자는 둥근 보름달을 잠시 빌려 내려놓은 듯, 서정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50대 ‘백자 달항아리 장인’ 강민수 씨는 20대부터 전통 조선시대 도자기 미학을 재현하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두 개의 반구(半球) 모양을 이어붙여 높이 40~60㎝ 안팎의 달항아리를 만들고 표면의 매끄러운 질감을 표현해내는 데 30년이 걸렸다. 경기 광주 쌍령동 가마터에서 이제 막 꺼낸 근작들은 물레로 위와 아래의 몸통(윗발, 아랫발)을 따로 만들기 때문에 약간 일그러진 듯한 달항아리 특유의 미학을 뿜어낸다.
어린 시절 열병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강씨는 20대 중반 단국대 대학원 도예과에서 조선시대 달항아리 재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귀 닫고 입 막은 채 묵묵히 물레질을 하며 ‘달항아리’에 매달렸다. 1998년 국제 공예공모전을 비롯해 사발 공모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잇달아 입상하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인공와우수술을 받아 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강씨는 “가마에서 아래위 이음매가 터지거나 두께가 맞지 않아 주저앉기를 수백 번 했다”며 “소나무 등걸에 앉아 있는 산비둘기 소리, 계곡물과 바람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조차 달항아리에 녹여내려 했다”고 말을 건냈다.
그는 달항아리 특유의 미감을 살려내기 위해 장작가마에 껍질을 벗긴 소나무로만 불을 때고, 흙도 전남 강진·무안을 비롯해 강원 양구 등에서 가져온 백토만을 고집한다. 장작가마에서 구우면 소나무가 타면서 재가 날아가 달항아리에 붙어 녹아 투박한 느낌을 내고, 백토를 써야 은은한 유백색 빛깔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 대표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전통적인 미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강민수와 박성민의 작품을 통해 K-아트의 국제적 잠재력을 경험하는 가을철 멋진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5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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