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미술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군사 독재정권이란 암울한 시대에 작가들은 저항적 의미보다는 그저 순백의 캔버스 위에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아, 물질계와 정신계가 합일되는 직관적 깨달음을 펼쳤다. 사회 정치적 메시지 덧대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성과 함께 내면 깊이 자리한 자유의 열망을 담아냈다. 작가마다 선택한 한지, 면포, 삼베 등의 재료에 무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물성(物性) 화면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작고한 윤형근 박서보를 비롯해 정상화 이우환 하종현 이건용 최병소 이강소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은 50년 넘게 국내외 화단을 누비며 K-아트의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1960년대 발아한 단색화 장르는 2010년대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들 작품은 물론 국내외 대가들의 수작, 고미술품, 보석류 등이 대거 경매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김창열의 '물방울' 사진=케이옥션 제공 |
미술품 경매회사 케이옥션이 오는 2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본사에서 여는 ‘가을 경매’를 통해서다. 출품작 136점의 추정가는 103억원에 달한다.
글로벌 미술시장이 조정을 받은 가운데 아시아 최대 ‘미술장터’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에 무려 8만20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면서 국내 아트마켓의 잠재력을 보여준 만큼 어느 때보다 한국 미술의 깊이와 다양성에 모처럼 투자할 수 있는 기회다.
케이옥션은 이번 경매의 ‘얼굴 상품’으로 김창열의 1973년 작 ‘물방울’을 내걸었다. 세로 198cm, 가로 123cm 크기의 대작이다. 경매 도록을 장식한 이 작품은 2001년, 2015년, 2024년에 잇달아 갤러리 현대 전시에 출품됐으며, 2009년에는 부산시립미술관의 기획전에 걸린 이력을 갖고 있다.
화면 상단을 빼곡히 수놓은 물방울들이 인상적이다. 물방울의 형태는 70년대에 걸맞게 관람자의 얼굴이 비칠 듯 투명하고 어느 것 하나 영롱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매는 최초 10억원부터 시작한다. 미술애호가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이번 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쓸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우환의 150호 ‘대화(Dialogue)’도 추정가 9억8000만~18억원에 나와 있다. 간결한 화면 안에 사각형의 거대한 점을 배치한 대작이다. 붓질과 여백은 유와 무, 혹은 허와 실의 관계로 치환해 마치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사각형의 점은 점차 희미해지는 그라데이션 효과를 보여주며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드러낸다.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의 100호 ‘무제’는 추정가 5억5000만~8억원에 경매한다. 한국적인 정서를 단순하고, 간결하고, 시원하게 표현한 희귀작이다. 물감이 번지는 느낌에다 색기둥 사이의 여백이 마치 묵빛 땅을 그려내듯 아싸하다.
박서보의 분홍색 100호 묘법 ‘No. 060730’ 역시 벌써 미술애호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추정가 5억~6억5000만원으로 새주인을 찾아나선 이 작품은 2000년대 후기 묘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밭고랑 같은 수직 패턴에 강렬하고 현란한 색감을 입힌 게 특징이다. 마치 선방의 수행자처럼 반복되는 신체 행위를 화면에 녹여내 ‘무욕의 미학’을 극대화했다.
도상봉의 '성균관 풍경' 사진=케이옥션 제공 |
한국 현대미술의 구상부문 대가들 작품도 줄줄이 경매에 부쳐진다.
‘라일락의 화가‘로 잘 알려진 도상봉의 수작 1958년 작 ’성균관 풍경‘은 추정가 8000만~1억2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단풍이 노랗게 익은 성균관 후원 풍경을 감칠맛 나게 묘사했다. 탄탄한 구성과 밝은 색조, 순박한 소재, 여기에 조선시대 문화재를 끌어들여 격조 높은 화면을 완성했다. 찻잔에 녹차가 스미듯 성균관에 담긴 화가의 애정이 노란 단풍의 향기와 뒤섞이며 향긋한 온기로 되살아난다.
서양화 고유의 명암법과 원근법을 무시한 김종학의 ’설악의 여름‘(2억5000만~3억5000만원) , 농촌과 과수원의 풍경을 선이나 그림자 없이 오로지 점과 터치만으로 완성한 이대원의 ’농원‘(4500만~1억원) , 채색화의 전통을 이은 이숙자의 작품(6000~8000만원), ’핑거페인팅 화가‘ 오치균의 120호 대작 ‘감’(1억5000만~2억8000만원)등이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출품됐다.
이숙자의 '이브의 보리밭-봄내음' 사진=케이옥션 제공 |
해외 작가로는 알렉스 카츠, 피터 할리, 우고 론디노네, 무라카미 다카시, 니콜라스 파티 등 글로벌 미술시장에서 조명받는 작가들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고미술부문에는 10폭짜리 ‘책가도’(1억2000만~2억5000만원)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시고’(2900~4000만원), 무화재 신의의 ‘산수도’(2800~6000만원), 다산 정약용의 ‘간찰’ (1100~2000만원), 운보 김기창의 ‘청록산수’(1000~2500만원), 소정 변관식의 ‘부항춘일’(800~1500만원) 등이 입찰대에 오른다.
경매 출품작들은 경매 당일인 25일까지 케이옥션 전시장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경매 참여를 원하는 경우 케이옥션 회원(무료)으로 가입한 후 서면이나 현장 응찰, 전화 또는 온라인 라이브 응찰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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