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 후기 인상주의 거장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1888년 2월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주하기 전까지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동생 테오로부터 코르몽의 스튜디오를 소개받은 그는 그림 수업을 받으며 호주 출신의 존 피터 러셀를 비롯해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퀘탱, 툴루즈-로트렉 등 쟁쟁한 화가들과 교류했다.
1886년 고흐는 당시 유행한 인상파 기법을 인정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붓 터치에 어딘가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넓은 붓으로 가로질러 문지르듯 이어간 붓질은 제법 갈색조의 큰 터치들을 만들어냈다.
김한기의 푸른색 점화'9-ⅩⅡ-71 #216' 사진=크리스티 제공 |
고흐는 1887년 여름 이런 붓터치로 아니에르의 강변을 드라마틱하게 버무렸다. 색채와 붓놀림에 대한 관심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자연 자체를 탐구하며 자신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아니에르의 풍경을 되살렸다. 이른바 고흐의 ‘아니에르 강변’ 시리즈 3부작은 그렇게 태어났다. 풍경화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훗날 고흐의 전설적인 화업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반 고흐의 ‘아니에르 강변’ 시리즈의 대표작 ‘정박한 배’를 비롯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중국 계 프랑스 추상화가 자오 우키의 그림, 한국 김환기의 푸른색 점화, 미국 화가 조지 콘도 작품 등 글로벌 수퍼스타들의 그림이 홍콩 경매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크리스티 홍콩이 오는 26∼27일 이틀간 홍콩 더 헨더슨 빌딩에서 여는 20 세기 및 21 세기 미술 이브닝·데이 세일 경매를 통해서다. 크리스티 홍콩의 아시아 태평양 본사 이전을 기념하는 대규모 이벤트 행사의 일환이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번 행사에는 글로벌 거장들의 작품 144점이 출품되며, 추정가 총액만도 1785억원(10억홍콩달러)에 달한다.
크리스티 홍콩은 아시아 큰손 컬렉터를 흥분시킬 만한 인상파 그림은 물론 추상화, K-아트까지 작품 영역을 넓히며 판촉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스타 작가 작품에 대한 아시아 지역 미술애호가들의 '입질'이 이어질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미국이 최근 4년만에 기준금리를 0.5%P 내린 만큼 글로벌 미술품 시장이 점차 회복세를 타면서 아시아 시장에도 봄바람이 불어닥칠 것으로 예상된다”며 “미래 투자 가치가 있는 그림을 골라 응찰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정박한 배’ 사진=크리스티 제공 |
크리스티 홍콩은 고흐의 1887년 작 ‘정박한 배’를 전략 상품으로 내걸었다. 가로 52cm, 세로 65cm 크기의 이 작품은 추정가 392억~647원으로 30여년만에 시장에 처음 공개된 수작이다. 고흐가 고향(그루트준데르트)을 떠올리며 아니에르의 풍경에 상상력을 더해 완성했다. 그가 1888년 파리를 떠나 아를에 머문 2년 동안 ‘별이 빛나는 밤’ ‘아이리스’ 등 걸작의 탄생을 예고한 작품이어서 국제 미술계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아시아 미술품 경매 최고 기록을 달성할 것이란 기대감이 솔솔 나오고 있다.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가 1897~1899년에 작업한 ‘수련’도 추정가 340억~476억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모네 가문에서 오랜기간 소장한 이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모네가 지베르니 자택에서 수련 연못을 모티브로 작업한데다 무수한 회화적 잠재성을 탐구한 초기 작품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연못 표면의 물, 공기, 빛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색한게 이채롭다.
크리스티 홍콩 측은 “모네의 모든 수련 연작의 대표작으로 이후 세대의 예술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며 “초기 수련 연작 중 4점은 각각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가고시마 시립 미술관,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매우 희소성 높다”고 설명했다.
한국미술의 ‘블루칩 작가’ 김환기가 1971년 그린 푸른색 전면 점화 '9-ⅩⅡ-71 #216'도 입찰대에 오른다. 추정가는 77억5000만∼112억원이다. 2019년 홍콩 경매에서 153억원에 낙찰돼 한국 현대미술 최고가 기록을 새로 썼던 김환기의 '우주'(05-IV-71 #200)와 같은 해에 제작됐다. 미술애호가가 20년간 소장해 오다 이번 경매에는 처음 내놨다. 1970년대 초에 제작된 김환기의 푸른색 전면 점화는 총 20점 미만인 만큼 희소성도 매우 높아 ‘우주’의 경매가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사진=크리스티 제공 |
중국계 프랑스화가 자오 우키의 세폭화 역시 추정가 132억 ~218억원에 출품됐다. 정물과 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추상화 스타일의 세 폭의 대작이다. 어두운 심연, 해저, 초현실적인 동굴과 하늘을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으로 표현해 완전한 신체적 자유와 무중력의 느낌을 느끼게 한다.
이 밖에 '21세기 피카소'로 불리는 조지 콘도의 2m가 넘는 대작 ‘임상적으로 정상인을 위한 처방’(68 억~102억원), 일본 현대미술 대가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25억~34억원), 요시모토 나라의 ‘ABC’(12억~17억원) , 이우환의 ‘동풍’(3억~4억7000만원), 윤형근의 ‘청다색’(1억7000만~3억4000만원), 이성자의 ‘숨겨진 나무의 기억들'(8억∼13억6000만원)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경매된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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