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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도 반한 달항아리 그림.... 인생길을 새긴 수만개의 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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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9-29 17:54:11   폰트크기 변경      
중견 인기화가 최영욱, 노화랑서 10월2~21일 개인전...25점 소개

불교에서 카르마는 ‘업보(業報)’를 뜻한다. 우리 인생은 마음 속에 그리는 대로 이루어지며,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된다. 따라서 좋은 생각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인생이 펼쳐지며, 나쁜 생각을 한 사람의 인생이 결과적으로는 잘 될 리가 없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경험한 절대 법칙이다.

'달항아리 화가' 최영욱 씨가  2일 개막한 노화랑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카르마'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노화랑 제공

이런 카르마의 원리를 그림에 적용한 화가가 있다. 바로 달항아리 그림으로 국내외 화단에 돌풍을 일으킨 중견 화가 최영욱이다. 달항아리의 무수한 빙열(균열)을 세세하게 잡아낸 그의 화법은 자신을 국제적인 작가로 키워낼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됐다.

2일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시작하는 ‘최영욱 개인전’은 달항아리의 넉넉한 미학을 화폭에 재현하며 카르마의 원리를 껴안은 화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리다.

1, 2층 전시장을 채운 25점의 달항아리 그림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재현해낼 뿐만 아니라 이를 매개로 인간의 삶과 인연에 대한 본질을 탐구한 근작이다. 엷은 회색 빛을 머금은 달항아리 특유의 그림이 일품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최씨는 “달항아리의 오묘함에 빠져 몸부림친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백자의 밝은 에너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인생의 업보까지 잡아내려 애썼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 달항아리는 세상 사람들의 인연과 운명을 보여주는 창(窓)이기도 하다. 극사실주의적 기법과 모노크롬미학을 지향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인생살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과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달항아리 표면의 무수한 빙열(氷裂)을 가는 붓으로 세세하게 잡아낸 게 압권이다. 빙렬은 도자기가 가마 속에서 구워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균열을 말한다. 캔버스 위에 백색 돌가루와 젯소를 사용해 수십 번의 겹칠과 사포질로 표면을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한 후, 빙렬을 하나하나 그려 화면을 메꿨다. 단순히 도자기를 재현하기보다 삼라만상의 인과관계를 마치 수도승이 수행하듯 미적 행위로 되살렸다. ‘카르마(karma)’를 모든 작품의 제목으로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자기의 균열을 하나하나 그리면서 삶은 우리가 의도한 데로만 가지 않고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어 “내가 그린 카르마(Karma)는 선에그 의미가 담겨있다”며 “그 선은 우리의 인생길을 은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술평론가 임창섭 씨 역시 “작가의 달항아리는 단지 소재일 뿐,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구분해 내는 특출한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기대할 것 없는 세상, 저절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느슨한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믿음과 노력이 세상을 우리답게 만든다는 진실을 보여주려 한다”고 평했다.
노화랑 전시장에 걸린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 '카르마'.                                                    사진=노화랑 제공

전시장에 걸린 달항아리 그림 역시 기품과 아우라를 뿜어낸다. 원래 17~18세기 조선시대에 유행한 백자 달항아리는 하얀 바탕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둥실하고 풍만한 어머니의 뽀얀 살결 같은 푸근함이 매력적이다. 하얀 달덩이처럼 미소를 뿜어내는 백자에 괜스레 안겨보고 싶어진다.

최씨는 “김환기와 도상봉 화백도 평생 달항아리에 반해 그림 소재로 즐겨 활용했다”며 “이번 작품들은 선방에서 도를 닦는 스님의 마음가짐으로 조상의 멋과 슬기를 되살리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달항아리는 볼수록 온기가 느껴집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겪은 사람에게 풍기는 단순한 멋이라고나 할까요. 진정한 모노크롬(단색화)은 조선백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씨는 실제로 그림을 통해 한국적 모노크롬을 아울렀다. 극도의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면서 대상과 배경 경계를 살며시 무너뜨려 극적 리듬감을 부여했다. 대상의 느낌과 공간감에 주안점을 두고 회화의 본질에 접근했다. 그는 올해까지 제작한 작품은 겨우 500점 남짓일 정도로 스스로에게 까다롭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아 내버린 그림만 수백 점에 달한다”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감을 얻었지만 어떻게 해서 달항아리의 본질에 접근하게 됐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최씨는 39세에 달항아리 그림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미술학원을 운영한 그는 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달항아리에 시선이 꽂혔다. 선비들이 달항아리를 앞에 두고 즐겼을 그 맛과 분위기를 살리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당장 붓을 들어 귀 닫고 입 막은 채 묵묵히 붓질을 하며 ‘달항아리 회화’에 매달렸다. 아파트 문화에서 도자기 그림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찾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일부 안목 있는 외국인들이 ‘웰빙 인테리어’로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서 최씨는 국내보다 해외 화단에서 더 유명해졌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스코프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최씨의 작품 세 점(4000만원)을 구입한 게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 7월 달항아리 그림에 반한 빌 게이츠는 최씨 가족을 시애틀에 지은 빌&멀린다 게이츠재단 건물 완공 기념식에 초대했다. 곧바로 그의 이름 앞에 ‘빌 게이츠가 선택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왕실, 필라델피아 뮤지엄 등이 최씨의 작품을 잇달아 구입하고 해외 유명 아트페어에서 그의 그림이 지속적으로 판매됐다. 전시는 이달 21일까지 이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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