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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영의 색면 마술....색깔에 파묻힌 50년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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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10-06 11:22:28   폰트크기 변경      
유 화백, 10월 20일까지 현대화랑에서 6년만에 개인전....수작 30여점 선봬

사각형 격자 화면에서 붉은 환희가 새어 나온다. 순박한  열정까지 담고 있다. 빨간 색면은 거침없이  안기고 , 옅은 빛깔의 붉은 띠는 마치 깃발처럼 소리없이 아우성친다. 색면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생각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묘한 생명감도 꿈틀거린다. 한국 색면추상의 선구자 유희영 화백(84)의 대표작 ‘2021 R-1’은 사색적이며 고요한 명상의 이미지를 안겨준다.

평생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입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던 류 화백의 이같은 작품을 보면 미국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한마디가 겹쳐진다. “풍경을 그리면서 화폭을 지워보니 오히려 원하는 그림이 됐고, 슬픔과 절망의 세상이 숭고한 추상으로 물들었다.”

유희영 회백의 작품 ' 2021 R-1'                                     사진=현대화랑 제공 


지난달 25일 개막해 오는 2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구관(현대화랑)에서 펼치는 유 화백의 개인전은 유럽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반구상을 시작으로 서정적 추상, 색면추상의 단계를 거쳐 50년째 추상미술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노화가의 기발한 조형세계를 탐색하는 자리다.

2018년 이후 6년 만에 열리는 전시회의 주제는 ‘생동하는 색의 대칭’. 극도로 절제된 수평, 수직 구도 속에서 한두 개의 색면으로 숭고한 분위기를 연출한 대작 30점이 걸렸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유 화백은 “기하학적 색면에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 중시 사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며 ”색깔을 다양하게 변주해 현대인의 심상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화랑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유희영 회백. 사진=현대화랑 제공


“현대인들은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에 빠져들어 서로에게 마음을 감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고요. 이들의 메마른 감성을 색채미술로 적셔주는 게 제가 지향하는 시각예술의 세계입니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를 거쳐 이화여대 미술학부 교수, 서울시립미술관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낸 그는 1980년대 한국 추상미술 운동에 동참해 색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회화로 표현해왔다. 초창기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시대((1901~1904)’로부터 영감을 받아 코발트 블루, 프러시안 블루 등 다채로운 청색으로 인간의 사유와 성찰을 모색했다. 1991년 작업실을 충북 옥천으로 옮기면서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원색 계열 색채를 많이 사용했다. 서구 모더니즘 추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한국적인 감성을 유지하며 몇 개의 색띠로 화면을 분할하면서 마음 속의 움직임을 잡아내 국내 화단에서 ‘색의 건축’이라는 장르를 선도하고 있다.

팔순을 넘어선 그는 최근 들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녹색 보라색 청색 등 밝고 선명한 색으로 가득찬 작품을 내놓고 있다.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 등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처럼 사물의 형태를 생략하고 간소화한 게 특징이다.

유 화백은 “작품에서 색채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작품의 주제이자 의미를 담는 매체”라고 했다. 실제로 ‘보이는 것만이 전체가 아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작품들은 붉게 타는 석양, 깊고 넓은 검푸른 바다, 맑은 가을날의 창천(蒼天), 녹청색의 무성한 여름 숲, 칠흑같은 겨울밤의 적막 같은 이미지를 ‘소환’하며 관람객의 시선을 하염없이 빨아들인다.

또한,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이루는 엄격한 구조, 속도성과 시간성이 담긴 색띠는 보이지 않고, 닿을 수 없는,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심원한 내재율의 세계로 안내한다.

실제로 색 조각들은 화면에서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며 현대인이 느끼는 존재와 부재, 실체와 허상의 사유를 관조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 나서는 듯하다. 미묘한 색의 감정은 같은 색을 찾아 흘러들어와 서로를 닮기도 하고, 서로 차이를 두며 디지털 시대 현대미술의 색다른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유 화백은 “색면추상 작업은 투쟁의 진행형”이라고도 강조했다. 작업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아서다. 단순한 그림은 기법이 아니라 재료의 문제라고 주장한 그는 “3~4일 걸려야 마르는 유화로 제작하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한 가지 색을 6~7회 이상 겹쳐 바르는 특유의 제작 방식을 통해 색채의 깊이와 밀도를 극대화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궁금했다.

“명상은 그림을 그릴 때 심장과 세포를 설레게 합니다. 감각을 더 자극해 색채감을 극도로 끌어올려주기도 하고요. 깊은 산 속의 절간을 타고 흐르는 미묘한 선율을 시각 예술로 표현해한 겁니다.”

명상 없이는 그림이 안 되고, 그림 그리는 수단 없이는 명상도 불가능하다는 뜻을 색면과 선을 통해서 보여준다.
“추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알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작가의 한마디가 뇌리를 스쳐간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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