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특성상 포탈에서 ‘아파트’를 습관적으로 검색한다. 그런데, 지난 주부터 난감하다. 로제의 ‘아파트(APT.)’만 쏟아져서다. ‘재건축’으로 쳐도 ‘윤수일 아파트 재건축 축하’가 난무한다. ‘아파트’라면 ‘딩동’으로 시작해 ‘별빛이 흐르는∼’으로 이어지는 윤수일 가수의 노래만 연상했는데, 42년 지난 지금, ‘블랙핑크’의 멤버 로제가 부른 ‘아파트’가 대박을 쳤다. 29일 미국 빌보드 메인싱글 차트 8위로 데뷔하면서 K팝 여성가수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하는 등 새 역사를 써고 있다.
네티즌 댓글이 인상적이다. ‘1982년에 나온 윤수일 아파트가 42년 만에 재건축됐다’부터 ‘3년 빠른 1979년산 은마아파트는 첫삽도 못 떴는데…’ 등이다.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아파트)’ 열풍과 맞물려 로제가 살고 있는 서울 ‘용산 푸르지오 써밋’ 38층 펜트하우스의 인스타그램상 탁 트인 뷰 사진도 부러움을 사고 있다. ‘블랙핑크’란 하이엔드 브랜드의 ‘로제건설’이 세계적 건축가 브루노 마스와 손잡고 글로벌 랜드마크를 재건축한 느낌이다.
과거 성냥갑형 일색의 외형에도 불구, 아파트는 1% 부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회현동 제2시민아파트에 살았다는 윤수일씨도 29일 한 인터뷰에서 “1980년대 초부터 아파트가 엄청나게 늘었는데, 너나 할 것 없는 모두의 로망이었다”라며 “이 노래도 한강을 끼고 갈대밭이 펼쳐진 잠실지구 아파트단지를 보며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랬던 아파트가 2020년 기준(인구총조사)으로 국민 절반이 넘는 56.86%, 지금은 60% 이상이 사는 주택이 됐고, 잠실지구를 포함한 서울은 물론 1기 신도시 등 수도권, 나아가 지방도시까지 지금 재건축 붐으로 들썩이고 있다.
뜬금없지만 ‘블랙핑크’가 아니라 무명가수였다면 이런 성공이 가능했을까란 생각이 문득 든다. 협업을 수락한 브루노 마스는 금주 빌보드 차트에 레이디 가가와 부른 또다른 노래를, 로제 ‘아파트’보다 높은 순위에 올린 세계적 아티스트다. 곡을 만들고 녹음하는 모든 환경이 최상이었을 것이다. 반면 대중음악계 뒤켠에는 생계도 잇기 힘든 무명가수나 연습생들도 넘쳐난다.
부동산시장도 초양극화가 심화되는 분위기다. 재건축시장만 해도 압구정ㆍ반포ㆍ성수ㆍ여의도는 물론 수도권 외곽과 지방권 단지마저 유찰을 거듭해도 대형브랜드만 고집한다. 나머지 99% 건설사들은 무명가수처럼 업을 접어야 할 지 고심하고 있다. 구조조정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최근 만난 20위권 중견건설사의 한 임원은 수주 근황 물음에 “어느 재건축ㆍ재개발조합도 우리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건설공사 절대량이 줄면서 중소건설사들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올해 8월 누적수주액은 122조원으로 2020년(194조원) 이후 4년 만에 연간 수주액이 200조원 밑으로 추락할 위기다. 2020년을 100으로 환산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공사비지수는 130 내외, 공사비가 30% 오른 상황에서 제자리걸음이라면 30% 이상 줄었다는 의미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9월 건설업 취업자는 2013년 이후 최대폭인 10만명이나 줄었다. 지방권 사정은 더 절박하다. 올 들어 작년(12곳)의 2배인 25개 건설사가 부도났는데, 21곳이 지방업체였다.
초인플레 시대에 치솟은 공사비 탓에 곳곳에서 시공사와 갈등하는 정비조합들도 발상을 바꿔보면 어떨까. 로제나 윤수일 가수 대신 가창력(기술력) 좋은 무명가수(건설사)에 맡기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특히 분담금 고민이 깊은 단지라면 적정가격에 빠르고 튼튼하게 재건축을 성공시킬 대안일 수 있다. 정부와 서울시 등 지자체도 이를 권장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특단책을 마련해야 한다. 티켓값이 싸면서도 블랙핑크, 윤수일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하는 무명가수들과, 전국 곳곳의 재건축단지를 착한 가격에 멋진 랜드마크로 탈바꿈시키는 중소건설사들의 활약이 펼쳐지는 날을 기대해본다.
김국진 기자 ji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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