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5400억이 부른 한미약품의 비극
[대한경제=김호윤 기자] “세계적 제약사를 만들겠다던 고(故) 임성기 회장의 꿈이 경영권 분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미약품 연구소의 한 연구원의 탄식이다. 20년 넘게 신약 개발에 매진해왔지만, 올 들어서만 이 연구소에서 수십명의 동료가 회사를 떠났다.
국민연금공단 자료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8월까지 한미약품과 한미사이언스에서만 300여명의 직원이 퇴사했다.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된 1월에 한미약품 직원 34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떠났고, 이후 7개월간 212명이 퇴사 대열에 합류했다. 한미사이언스도 같은 기간 69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한미약품 관계자는 “한미약품의 최근 3년간 연평균 퇴사자가 300명 안팎으로, 올해도 예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경영권 분쟁과 무관하게 연구개발 투자를 오히려 더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미약품은 ‘한국의 로슈’를 꿈꿨다. 2015년 글로벌 제약사들과 잇따라 대형 기술수출에 성공하며 한국 제약산업의 새 역사를 썼다. 연매출 1조원을 돌파한 첫 국내 제약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이 ‘제약한류’의 상징이 오너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휘청이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신약 개발의 상징과도 같았던 한미약품그룹이 오너일가의 분쟁으로 존립 위기에 처했다”면서 “수년간 쌓아온 기업 가치와 연구개발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발단은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별세였다. 540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되면서 가족들은 갈라섰다. 모녀(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와 형제(임종윤 사내이사·임종훈 대표)의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모녀는 상속세 해결을 위해 OCI그룹과 통합을 추진했다. 현금 조달과 동시에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형제는 “재벌 편입”이라며 반발했다. 이들은 그룹 통합 논의 과정에서 소외됐고 통합 방식에 동의하지 못한다며 법원에 신주발행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를 쥔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형제 편에 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회사의 지배구조 및 경영권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거래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신 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12.15%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였다.
신 회장을 등에 업은 형제는 지난 3월 열린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승리하면서 형제가 제시한 ‘이사 5명 선임 주주제안’이 가결됐고, 결국 OCI와의 통합은 무산됐다.
여기서 다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불과 몇 달 만에 모녀 측으로 돌아선 것이다.
형제가 추진하던 해외펀드 지분 매각에 반대하고, 상속세 해결방안 부재를 지적하면서 지난 7월 모녀 측과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이하 3자 연합)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모녀는 한미사이언스 지분 6.5%를 신 회장에게 매각했다.
3자 연합은 현재 ‘한국형 선진 경영체제 확립’을 표방하며 전문 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3자 연합은 통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는 한미사이언스의 임시 주총을 요청했다.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 계약을 통해 48.19%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사회 구성에서 형제 측에 4대 5로 밀리면서 경영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권 분쟁에 주요 그룹 계열사 또한 분열되고 있다. 한미약품그룹의 핵심 사업회사인 한미약품은 한미사이언스와 독립 경영을 선언하고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북경한미약품, 한미정밀화학, 온라인팜, 제이브이엠, 한미사이언스 헬스케어 사업 부문 등 주요 계열사들은 이러한 독립경영 노선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실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미약품과 한미사이언스의 매출은 정체되고 영업이익은 두 자릿수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3분기 연결기준 한미약품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0.7% 감소한 3621억원, 영업이익은 11.4% 감소한 510억원, 한미사이언스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4.2%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224억원으로 37.2% 감소했다.
김호윤 기자 khy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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