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사무소ㆍ대학 서로의 성에 갇혀
실무ㆍ이론 만나는 새 교육 모델 필요
제2도시 ‘부산’ 잠재력 강조하며
“혁신, 종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
15일 서울 중구 시청에서 열린 미래공간기획관의 창의직무교육에서 피터 쿡(Sir Peter Cook) 건축가가 발언하고 있다. / 사진=전동훈 기자. |
[대한경제=전동훈 기자] “건축계가 너무 진지해졌고, 대학은 상아탑에 갇혔습니다. 특히 한국의 건축교육은 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60여 년간 건축계의 이단아 불린 건축가 겸 교수 피터 쿡(Sir Peter Cookㆍ88)은 지난 15일 서울 중구 시청 본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미래공간기획관의 창의직무교육에서 날선 조언을 내놨다.
1960년대 영국을 풍미했던 ‘아키그램’의 창립멤버인 그는 도발적인 상상이 담긴 수십장의 드로잉을 펼쳐보이며 한국 건축이 지닌 경직성을 지적했다.
‘명랑한 건축(Cheerful Architecture)’을 주제로 열린 이번 특별강연에는 시작 전부터 3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리며 북새통을 이뤘다. 젊은 건축학도들은 노장의 드로잉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강연장 앞쪽에 긴 줄을 만들었다.
건축물의 생명력을 강조한 피터 쿡은 “건축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숨을 쉬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때로는 녹아내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1967년작 ‘도시의 흔적(Urban Mark)’를 가리키며 “드로잉 속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식물이 자라나고, 형태가 변화하며, 도시와 함께 호흡하는 모습으로 진화한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중구 시청에서 열린 미래공간기획관의 창의직무교육에서 피터 쿡(Sir Peter Cook) 건축가의 강연이 끝난 뒤 토론 세션이 열렸다. (왼쪽부터) 이원재 행림종합건축사사무소, 피터 쿡 건축가, 존홍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 / 사진=전동훈 기자. |
스크린에 비친 피터 쿡의 대표작 오스트리아의 ‘쿤스트하우스 그라츠’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도시에 생동감을 더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현장의 건축가들은 피터 쿡이 건축계에 미친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
박영우 나인이스트 디자인서울 대표는 “피터 쿡이 1960~70년대 제안한 ‘플러그인 시티’는 노만 포스터, 리처드 로저스와 같은 대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며 “건축사조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강연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도시의 틈’에 대한 제안이었다.
도시 공간의 새로운 활용을 강조한 그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열린 코너공간을 예로 들며 “도시 곳곳에 예상치 못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터 쿡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마주친 핑크색 외벽의 가게가 품은 지상공간을 보여주며 “도시는 틈새에서 활력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한국 건축교육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피터 쿡은 “설계사무소와 대학이 서로 분리된 채 각자의 성에 갇혀있다”며 실무와 이론이 만나는 새로운 교육 모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2도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언급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부산의 잠재력을 언급하며 “제2도시는 완벽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더 자유롭게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다”며 “혁신은 종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현장의 학생들도 큰 감명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성주 학생(중앙대 건축학과 3학년)은 “88세라는 고령임에도 창발적 사고로 혁신을 추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그의 시각이 한국 건축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는 이원재 행림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박진철 대한건축학회장,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 존홍 서울대 건축학부 교수, 임창수 서울시 미래공간기획관 등 건축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피터 쿡은 1961년 영국에서 시작된 실험주의 건축그룹 ‘아키그램’의 창립멤버다. 전후 획일적 모더니즘에 한계를 느낀 젊은 건축가들이 모여 만든 아키그램은 테크놀로지와 소비문화, 이동성 등 급변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건축을 추구했다.
실제 건물 설계보다 생동감 넘치는 미래 도시 드로잉으로 건축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영국 하이테크 건축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특히 피터 쿡은 지난 1964년 거대 구조체에 캡슐형 주거공간을 끼워 넣는 ‘플러그인 시티’를 제안하며 파격적 아이디어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피터 쿡은 이후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 그라츠, 영국 본머스 예술대학 등을 설계하며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지난 2002년 영국 왕립건축가협회 골드메달 수상하고 2007년 영국 기사 작위를 부여받는 등 건축적 성취 또한 인정받고 있다.
전동훈 기자 j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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