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최지희 기자] 고금리ㆍ고환율ㆍ고물가 등 3고(高) 현상이 장기화되며 한국건설의 수주ㆍ기성ㆍ수익의 3저(低) 현상을 고착화시켰다. 이 가운데 보상 없는 안전과 환경에 대한 규제까지 겹치며 건설산업 자체가 성장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이다. 수주산업이 입찰을 기피하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만연한데도 정부의 대책에는 절실함이 없다. 전문가들은 건설원가를 최단기간에 현실화시켜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만, 가격을 뛰어넘는 기술력 재무장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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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채희찬 대한경제 건설산업부장
△위기의 한국건설, 이대로면 침몰한다
채희찬 부장(이하 채): 과거 한국 건설산업이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으로 작동하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유의미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주목을 받았지만, 현재는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자취를 감췄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다. 한국건설의 성장엔진이 꺼졌다는 평가에 대한 생각은?
이복남 교수(이하 이): 과거 한국건설의 혁신 프로젝트는 ‘선수요, 후공급’ 원칙에 따른 대규모 국토 인프라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재정이 주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실종됐다. 이런 환경 변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산업생태계 변화로 산업단지보다 도시가 일자리를 만들어내며, 밀집도시가 도시 인프라의 재구조화를 요구한다. 다만, 밀집도시 개발은 재정보다 민간자본이 대세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새로운 모델로 변한 것이다. 한국건설이 강했던 재정 주도 도급사업의 프레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전영준 : 여전히 우리 건설산업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 내외에 달하는 국가 경제 성장의 핵심 산업이다. 다만, 영업이익률과 매출액 증가율이 장기간 답보 상태이다 보니 성장엔진이 꺼졌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여전히 국내에는 혁신 프로젝트가 다수 존재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경간을 가진 사장교인 고덕토평대교가 그 예다. 그럼에도 한국건설이 위기에 처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산업의 진흥과 육성을 위해 현 시점에 혁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수에 가로막힌 산업으로 주저앉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원재(이하 재) : 덴마크와 로테르담의 건축물, 그리고 뉴욕 허드슨강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정부가 자국 내 프로젝트의 가치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은 발주처가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우선한다. 현재 한국건설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기술력만큼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국 내 편견에 갇혀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는 한 과거 사우디 등 중동지역에서 쌓았던 한국건설의 명성과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의계약 증가, 공공조달 붕괴로 이어질 것
채 : 최근 공공 발주사업에서 원가 초과 현상이 잦아지며 기술형입찰 유찰과 수의계약이 늘어났다. 기술 경쟁이 실종된 작금의 상황이 단기 혹은 중장기적으로 건설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김정훈(이하 김) : 앞으로도 수의계약은 당분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쟁 시 공사원가의 추가 하락을 우려해 경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의계약이 늘면 건설사는 사업에 대한 보수적 접근이 점차 일반화할 것이고, 이로 인해 건설사 입장에서는 건설원가를 지키기 위한 설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산업 경쟁력 약화는 피하기 어려운 수순이다.
김재훈(이하 훈) : 기술형입찰 유찰 증가는 빠른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건설산업뿐만 아니라 공공조달시스템의 붕괴로까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건전한 경쟁을 통한 물량 확보보다 각종 꼼수와 부조리도 마다않고 공멸적 손실까지 감수하는 일부 공격적인 업체들을 중심으로 독과점이 커지면서 공공건설시장의 건전성과 안정성이 크게 훼손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중장기적으로 대부분의 건설사 경영이 악화되고, 연구개발 투자 감소에 따른 기술혁신 실종, 손실 분담 요구로 인한 건설 생태계 붕괴, 인력 수급 문제 심화 등 건설산업의 전반적인 기반이 붕괴될 뿐 아니라 공공조달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혁신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의 ‘방시그룹’은 불가능한가
채 : 최근 SK에코플랜트 등 주요 그룹의 건설사들이 수익성 저하 등의 이유로 토목부문에서 사업을 철수하고 구조조정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건설산업이 한계에 직면한 이유와 해결책은 무엇일까?
전 : 한국건설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상황이지 않나 싶다. 기본적으로 박한 공사비와 계약상대자에게 리스크를 전가하는 우리 산업의 고질적 문제와 더불어 시기별 이익 상품에만 집중한 고도ㆍ다각화되지 못한 사업 구조의 반복 탓이다. 전 세계 1위 건설기업인 프랑스의 방시(VINCI) 그룹은 전 세계 고용인력이 27만명이 넘고, 4000여개의 자회사나 손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어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영업이익률은 16%가 넘고 경상이익만 하더라도 11%가 넘는다. 이런 모델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건설정책의 방향을 육성으로 전환하고, 중소기업들은 피터팬 증후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 글로벌 건설시장은 토목과 건축, 플랜트의 수익 모델이 고르게 분배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건축 비중이 70%를 넘는다. 대기업들이 기술보다 주택 브랜드에 몰입된 탓이다. 대표 건설사가 어김없이 내세우는 주택 브랜드는 해외 발주처가 절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글로벌 인프라 건설시장은 지속 성장하게 되어 있다. 가격을 뛰어넘는 기술을 재무장하면 언제든 시장 확대가 가능하다. 한국건설이 주력해야 할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영과 기술전략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훈 : 그룹사들의 토목사업 철수는 국내 공공 건설시장에서 건설 그 자체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이미 존립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건설산업을 국가 정책적 필요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강력하게 규제하고 간섭하면서도 예산 절감 중심의 약탈적 계약을 강요하며, 부정적 시각으로 짓눌러온 결과다. 정부가 자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
△민자, 시장 논리 잃어 기업 참여 실종
채 : 재정사업이 답보 상태인 가운데 민자시장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작년 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위례신사선이 결국 재정사업으로 전환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민자사업이 경쟁 구도를 갖춰 정상화되려면 어떠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나?
김 : 지난해 발표된 민자 활성화 대책에서 2000억원+α 규모의 출자 전용 인프라펀드 조성과 만기 없는 환매 금지형 인프라펀드 허용 및 공모펀드 활성화 등은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출자 전용 인프라 펀드는 사업별로 출자 지분의 3분의 1 이하로 투자하며, 준공 시에 투자금을 회수해 준공 이후 운영단계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준공 시 투자금을 회수하기보다 운영기간까지 연계되도록 만기 조건을 여유 있게 부여해야 한다.
15% 이상으로 정해놓은 자기자본 비율을 완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사업규모가 1조원을 넘어 3조∼4조원 이상으로 커져 출자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건설사뿐 아니라 재무적 투자자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또 공공과 마찬가지로 민자사업 역시 공사비 현실화가 필요하다. 민자 활성화 대책에서 공사비 급등 상황을 감안해 최대 4.4% 이내 금액을 총사업비에 반영한다는 특례 조항이 마련됐지만, 일부 사업에만 해당한다는 한계가 있다. 관련 조항을 보완해 공사비 급등을 겪은 최근 협약 체결 사업까지도 그 범위를 확대하고, 이에 대한 세부 논의는 수요기관 재량 하에 사업자가 협의토록 한다면 최근 어려움을 겪는 민자사업이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채 : 민자사업 자체의 낮은 수익성도 문제다.
김 : 민자시장은 금리 등 시장 환경에 따라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란 점을 정부가 이해해야 한다. 민자 역시 사업수익률 산정과 공사비 낙찰률 적용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업수익률은 과거 유사사업의 수익률을 적용하는 것이 관례다 보니, 고금리 시대에 아직도 저금리 시기의 사업 사례를 적용하며 기업의 사업 참여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공사비 낙찰률도 문제다. 최근 원가상승으로 90% 후반대에 낙찰률이 형성되고 있으나, 민자사업은 RFP에서부터 낙찰률 90% 초반 수준을 적용한 공사비가 제시되며 공공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 시장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민자사업의 근본 취지를 되살려야 한다.
△설계ㆍENG도 한계산업에 갇혀
채 : 설계와 엔지니어링은 건설의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분류되지만, 주요 대형사들 모두 매출은 증가하면서도 영업이익률은 3%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한계산업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한명식(이하 한) : 근본 원인은 비현실적인 대가이지만, 이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강조하고 싶다. 우선 설계ㆍ엔지니어링을 용역 단계 업역에 가둬놓은 탓이 크고, 억지로 짜놓은 예산에 용역 대가를 산출하다 보니 형편없는 발주금액이 책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외국과 달리 한국은 컨소시엄 또는 하도급 약정으로 해결할 부분을 ‘상시 고용’으로 풀어내려 한다. 또 젊은 기술자를 양성하지 않으니 인력이 고령화되며 고임금 구조에 갇힐 수밖에 없다.
재 : 우리 회사는 지난 35년 동안 90% 이상이 공공분야로 이뤄진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수주 물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을 개선하지 못한 이유는 발주처에서 제공하는 수주 물량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라는 현상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실제 예산 책정이 5년 전 기준의 예산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이는 물가 상승률과 에스컬레이션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실수가 부당한 방식으로 기업에 전가되고 있는데 어떻게 이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겠나.
△건설산업 재도약을 위해선
채 : 건설산업의 성장 엔진을 달구려면 근본적으로 국민의 응원을 받는, 호감도가 높은 산업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산업 내외적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전 : 최근 정부 차원에서 건설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다양한 민관 합동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런 부분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산업 이미지 개선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응원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산업의 이미지가 고임금과 보상을 받으며, 계속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IT산업, 반도체산업 등이 그 예다. 일본이 지난 1989년부터 우리와 유사한 이미지 개선 홍보활동을 했지만, 결국 산업 이미지 제고는 적정 공사비 지급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훈 : 국민의 응원을 받고자 어떤 특별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건설산업 자체가 진취적인 멋진 산업이 되면 되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그 동안의 자정 노력에도 근절되지 않는 부조리들, 특히 기술형입찰 심의 과정의 불공정성에 대해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근절하려는 범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또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트렌드에 맞춰 타 산업과 협업하고 변화의 실행 동력을 산업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정부가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
한 : 우선 건설 안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설계단계에서 품질 확보를 위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국민과의 약속 이행도 중요하다. 철도를 언제 개통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선 철저한 사전 분석과 예산 확보를 하고 엔지니어의 전문성이 발휘될 영역이 확보해 줘야 한다.
이 :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국가 경제 성장에 어떻게 기여할 지를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 건설보다 국토 인프라를 앞세우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또 이를 위한 혁신적 대책을 국가 컨트롤 타워 차원에서 빠르게 추진해야 하는데 지금의 정부는 절실함이 없다.
정리= 최지희 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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