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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왼쪽),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오른쪽)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장실에서 국민연금 개혁안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재석 277명 중 찬성 194명·반대 40명·기권 43명으로 통과됐다. /사진: 연합뉴스 |
국가적 대사의 갈림길에서 정치 지도자의 판단력은 중요하다. 판단의 향방에 따라 많은 국민의 행불행이 갈리고 경우에 따라선 생사가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판단이 요구되는 갈림길에선 강경론과 온건론, 명분론과 실리론, 이상론과 현실론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실례로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를 많이 든다. 조선시대 인조 때 후금이 급부상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할 때 척화파는 “후금은 오랑캐이므로 절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강경론과 명분론을 주장했다.
반면 주화파는 “국력이 약해 싸우면 나라가 망한다. 전쟁을 하면 백성만 고통받는다. 일단 화친하고 실리를 도모하자”며 온건론과 실리론을 주장했다. 인조는 처음엔 주화파 주장을 받아들였다가 척화파의 공세에 밀려 강경 노선을 택했고, 그 결과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항전 끝에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하며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것도 문제지만, 백성들 피해는 유례없이 막심했다. 청군에 의한 약탈, 학살 등 민간인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노역과 노예, 궁녀와 첩으로 수십 만 명의 조선인이 청으로 끌려가는 참화를 당했다. 일부 돌아온 여성들이 겪어야했던 2차 피해의 상징인 '환향녀'라는 단어의 상흔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굳이 400년 가까이 지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이 지면에 소환한 것은, 현실적 한계를 도외시한 정치 지도자의 이상론적 판단이 현실을 살아가는 국민 삶에 손실과 피해를 초래하는 경우는 지금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3%’를 골자로 하는 모수개혁안이 담긴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근로자와 기업이 각각 절반씩 부담해 9%를 내던 보험료율은 내년부터 0.5%포인트씩 8년간 인상돼 13%로 높아진다. 올해 41.5%이고 2028년까지 40%까지 낮아질 예정이었던 소득대체율은 내년부터 바로 43%로 오른다.
이로써 당초 2056년으로 예상됐던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점은 2064년으로 8년 정도 늦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금을 투자해 벌어들이는 수익률을 현재의 4.5%에서 5.5%로 끌어올릴 경우 그 시점은 2071년으로 더 늦어진다고 한다.
아무튼 날마다 885억원의 적자가 쌓인다던 기금 재정에 적자 폭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여야는 이날 연금특위 구성에도 합의했다. 특위에서 구조개혁 문제,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에 대해서도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모수개혁안이 지난해 5월28일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정부여당의 반대로 불발됐다는 점이다.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를 제안하며 모수개혁에 유연한 입장을 취했지만 여권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은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순차적으로 하자는 이 대표의 주장은 얕은 수”라면서 “휘둘려선 안된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이 대표의 ‘단계추진론’에 유 전 의원은 ‘병행추진론’으로 맞섰던 것이다. 안철수 의원도 이 대표의 제안에 반대했고, 윤상현 의원과 당시 원외였던 나경원 의원은 당초 이 대표 제안에 찬성했다가 뒤에 반대로 돌아섰다.
그에 반해 윤희숙 전 의원은 “고난도 문제에서 진전을 보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면서 “이 대표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순차적 개혁을 지지했다. 물론 유 전 의원 등이 찬성했더라도 '해병대원 특검법 재표결 부결'에 역점을 두고 “22대 국회로 넘기자”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 입장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윤 대통령은 논외로 치더라도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있는 정치인의 판단력에 대해선 평가가 필요하다.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동시에 추진하는 게 이상적이고 최선안이지만, 현실적으로 구조개혁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부터 먼저 하자는 게 단계추진론의 취지였다.
결과적으로 작금의 현실도 단계추진론으로 귀결됐다. 다만 지난해 1차 기회를 놓치고 328일이 지난 시점에서 모수개혁이 뒤늦게 성사된 데 따른 수천억 원대의 기회비용은 국민 부담으로 돌아왔다.
유 전 의원은 22일 SNS 글에서 “국회를 통과한 '13%-43%'는 땜질하기로 담합한 것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 뒤 “이 대표의 속임수에 국민의힘도, 언론도 휘둘리고 영합한 결과”,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을 다시 해야한다”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병자호란 패전 후 인질 겸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도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척화파 김상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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