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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외길 40년...“촉각-정신-행위를 버무린 인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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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3-30 16:22:43   폰트크기 변경      
이희돈 화백 4월 4일부터 5월1일까지 포브갤러리에서 개인전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작업실에서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강화도 불은면 고능리(이희돈 뮤지엄)에 똬리를 튼 게 2020년이었다. 뭔가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는 당찬 도전의 출구였다. 어쩌면 불심이 두터운 모친이 병약한 아들을 살리려 이산 저산 공양을 드렸던 절박한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작업실을 옮긴 첫날 저 멀리 포구의 찰랑거리는 물빛이 야트막한 산턱까지 휩쓸었다. 쏟아지는 밤빛의 기세도 좋았다. 작업실 구석구석까지 짙은 고요가 파고들었다. 화방을 운영하며 평생 화가로 살아온 부침의 세월이 마치 무거운 고독의 아우라처럼 이랬다.

붓과 물감을 손에 쥐고 평생을 꿋꿋하게 불나방처럼 살아온 그에게 그림은 인생의 파도를 견디게 해준 반려자 같은 존재다. 인생 고비마다 그림 작업은 위안이 돼 주었다. 붓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면 모든 시름이 물거품처럼 꺼진다. 자신이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붓을 들고 갠버스 앞에 서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정리가 됐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참선을 통해 안목이 열리고 불이(不二)를 펼치는 신명 나는 잔치 같은 것이다.

인천 강화군 스튜디오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팔짱르 끼고 서 있는 이희돈 화백.    사진=김경갑 기자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속풀이 마당을 연출한 K-화단의 간판급 단색화가 이희돈(75)이 붓끝으로 세상을 깨우는 이유다.

그렇게 화가로 40년의 긴 시간을 살아온 그를 또 한 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다음달  4일 시작해  5월 1일까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포브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을 통해서다.

‘인연의 결(結)’이란 철학적 주제를 걸고 강화도에서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매일 10시간 넘게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10호 소품에서 300호에 달하는 근작 ‘인연’ 시리즈 30여 점을 풀어놓는다. 화려한 단색조의 직물이 펼쳐져 있거나 나무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골판지 위에 그물망이나 스테인리스 망을 격자형으로 배열하고 20~30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을 올려 작업한 단색화의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화백은 1990년대 후반 골판지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뚫는 타공 기법에 착안해 이를 자신의 조형 언어로 채택했다. 닥나무를 빻아 만든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발라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단색화 영역을 개척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세 번이나 입상한 그는 닥나무를 빻아 만든 물감으로 발명 특허도 취득했다. 2015년 부산아트페어에서는 인도의 5대 재력가 베누 스리니바산 TVS모터스그룹 회장(81)이 이 화백의 작품에 반해 대작을 구매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인천 강화군 불은면 고능리 446의 1 일대에 스튜디오를 겸비한 미술관(이희돈뮤지엄)을 짓고 지역 주민들과 문화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메이저화랑인 사치갤러리의 러브콜도 받았다.

최근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이 화백은 “나는 어떠한 형태도 그리지 않았다. 작은 이미지조차도…”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한 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의 요체로 꼽은 촉각과 정신, 행위는 한 공간에서 겹치거나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지점을 향해 퍼져 나간다.

강화도 작업실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이희돈 화백.                                사진=이희돈뮤지엄 제공


“평범한 소재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고픈 열망을 많은 사람들과 따뜻한 커피를 마시듯 향기롭게 공유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이 감질나다.

전시장을 채운 30여 점의 단색화는 회화적 상상력과 감성적 에너지를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응축해서인지 화려한 원색의 미감을 힘껏 뿜어낸다. 실제로 이 화백의 작품은 순백의 격자 캔버스 화면 위에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아, 물질계와 정신계가 합일되는 직관적 깨달음을 펼쳤다. 사회 정치적 메시지를 덧대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성과 함께 내면 깊이 자리한 자유의 열망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 화백은 작품 소재를 주로 불교에서 찾는다. 불교 신자는 아니 지만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글귀를 평생 화제(畵題)로 삼았다.

그는 인다라망의 의미에 대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유기체로 더불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표작 ‘연(緣)’ 시리즈는 젊은 시절 불교에 대한 경험을 마치 재즈 음악처럼 풀어냈다. 채도가 높은 선과 면, 그물망과 철망의 그림자로 구성된 작품들은 과거 작업보다 한층 관념적이다. 강렬한 색감의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단색화의 힘’을 보여준다. 사실주의 풍경화에서 출발해 이제는 한국 화단에서 당당한 단색화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붓질이 이어질수록 변화하는 그림 맛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색과 선, 무수한 기공의 형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물감과 한지, 그물망 등 미술적 재료를 가지고 인간, 우주, 자연의 무수한 인연을 축조하는 작업”이라며 “법문을 외듯, 참선을 하듯  탈아(脫我)의 경지에 들어서려는 행위의 반복”이라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와 갤러리스트들 역시 “이 화백의 작품은 붓놀림의 반복 행위를 통해 탈아(脫我)의 경지를 색채언어로 승화한 시각예술”이라고 격찬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 씨는 “무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물성(物性)을 화면에 드러낸다”며 “화업 내내 컴컴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두레박’을 건져올리는 ‘색의 마술사’ 역할을 자처한 아티스트”라고 평했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씨도 “현대인의 삶과 중첩된 물질 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감성을 치유하듯 일종의 자가 처방전을 화면에 담아내려 한 이 화백의 미학이 돋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색깔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며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색채(희망)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려 애쓰는 작가의 열정이 도드라진다”고 덧붙였다.

미술시장 전문가 이경택 씨는 “형상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 화백의 그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아우라가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라고 했다. 그의 그림이 묘한 향수나 추억, 고독감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이 화백 작품들을 소설이나 시처럼 여운이 묻어나는 것처럼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응축했다는 평가도 눈길을 끈다.

노태운 포브갤러리 대표는 “회화란 내적 실재를 발견하는 통로”라며 “가령 화면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붓으로 묵묵히 평면의 정지작업을 해가는 일련의 작업 과정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행성이 하나의 목적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10년 전 화방을 아예 접고 그림이 더 ‘고파’ 궁리했던 화가의 끝없는 미술수행이 이제는 현란한 색채와 인연의 흔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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