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196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르네 클레망 감독의 서스펜스물이다.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 ‘재능 있는 리플리 씨’가 원작인 이 영화는 비상한 두뇌와 매혹적인 외모를 타고났지만 부와 사회적 지위는 가지지 못한 서민 출신 청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를 그렸다. 알랭 들롱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권여현의 '낯선곳의 이탈자들' 사진=오케이앤피 제공 |
전설적인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가슴 깊숙이 품고 40년 동안 시각예술을 이어온 미술가가 있다. 바로 홍익대 회화과 교수 권여현(64)이다. 권 교수에게 이 영화는 인생의 파도를 견디게 해준 반려자 같은 존재다. 그림이 안 풀릴 때마다 위안이 돼 주었다. 작업 구상이나 플롯이 막막할 때도 주인공 알랭 드롱이 펼치는 열정적 연기를 떠몰리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정리가 됐다. 또 활로를 모색하는 아이템들이 화면에 이슬 맺히듯 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그림과 영화는 더 이상 둘이 아니었다. 영화는 그의 미술 인생에 조미료 같은 구실을 한 셈이다.
그렇게 미술가로 살아온 시간이 그를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권 교수가 오는 6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조선호텔 4층 전시장 오케이앤피(OKNP)에서 열리는 ‘태양은 가득히’전은 영화와 함께한 40년 화업의 흔적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보이는 자리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50여 점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권 교수는 “내 그림의 주제는 일상을 넘어 상상의 세계,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며 “희뿌연 생명력을 그리운 미감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196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권 교수는 대구에서 유년·청소년기를 보냈다. 영선초, 대구중, 경북고를 졸업한 뒤 1981년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원광대 미대에서 교수를 하다 국민대를 거쳐 2016년 홍익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80년대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판치던 시절에도 특정한 미술 사조에 속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독립적인 예술 언어를 확립했다.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포스터 모더니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 언어 덕분에 화단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동안 창작미협 대상(1984)을 비롯해 동아미술상(1986), 석남미술상(1991), 하종현미술상(200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올해의 작가상(2018년)을 잇달아 수상하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색다른 족적을 남겼다. 미술 비평가들은 그를 “한국 미술이 세계 동시대 미술과 호흡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작가”라고 평했다.
권여현의 '낯선곳의 이탈자들'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전시장을 들어서면 그의 예술적 실험과 변화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고즈넉한 미감을 뿜어낸다. 온라인에서 떠돌고 있는 일명 ‘밈(Internet Meme)’에서 이미지를 가져와서 그런지 아이러니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다. 또 한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이 화려한 색과 함께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어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기성 화단의 틀에 갇혀 있지 않는 작품들도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신화 속 인물, 문화와 상징, 현대인의 분열과 파국, 개인의 일탈, 뱀과 맹수가 뒤엉켜 있는 그림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유연함과 순수함을 선사한다.
권 교수는 이처럼 현실의 세계에 기반을 두면서도 초월적 상상의 세계를 향한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성과 합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시각 언어를 재즈 음악처럼 자유자재로 연출하는 과정이 매우 철학적인 셈이다.
오상현 오케이엔피 대표는 “자유로운 표상을 향한 작가의 속도감 있는 붓질, 우연함을 허용하는 화면 구성, 작가의 신체적 해위는 자유로움과 비정형성, 유동성을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의 작업들은 실제로 지적이고 묵직한 해석, 내러티브가 따라 붙는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희망,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미세한 오감의 세계, 비언어적 율동과 같은 원초적이고 초월적인 사유에 관한 갈망이라는 메시지를 관람객들에게 보낸다.
한편 권 교수는 지난 1년간 전시기획자 김노암, 김언호 출판도서 한길사 대표와 함께 ‘한국현대미술의 발견’이란 대주제 아래 서울과 경기 등 여섯 군데에서 동시 개인전을 가지며 그의 복잡하고 방대한 작품세계를 보여줘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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