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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현대 헤리티지] (2) 고급 아파트 대명사…‘강남 신드롬’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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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4-04 05:00:22   폰트크기 변경      
강남 시대의 주역

최고 15층 한강변 아파트 시작

신공법 집약…건축기술 경연장

국내 첫 전용 140㎡ 이상 선보여

서민 주거인식 뒤집은 고분양가

건축미ㆍ주거환경 조화 선풍적 인기

경부고속道 개통ㆍ명문고 이전 한몫

특혜 논란 ‘분양 스캔들’로 급부상


급격한 공업화‧도시화가 핵가족화와 맞물리며 주택 부족이 사회 문제로 등장한 1970년대. 지금의 ‘압구정동’이 포함된 한강 이남 일대가 이를 해결할 주거지로 본격 육성되기 시작한다.

현대건설은 1975년 당국 정책에 따라 고급 주거 단지를 표방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압구정 현대)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6000여가구의 대규모 단지에도 쾌적한 주거 환경에 학교, 상가 등 독립적인 생활권까지,

압구정 현대는 계획적 주거 단지의 표본이 됐다. 이후 강남에 들어서는 다른 대단지 아파트들에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풍경마저 바꿔놓았고,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내 아파트 건축의 대명사가 됐다.

착공 50년을 맞은 압구정 현대가 재건축을 앞두고 새로운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사는 공간으로서, 사는 동네로서 그리고 삶의 가치로서의 압구정 현대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편집자주>


한강의 동호대교(가운데) 남단 좌측부터 성수대교(오른쪽) 남단 우측까지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가 형성돼 있다. /사진:현대건설 제공

[대한경제=이종무 기자] 도시에는 사람을 이끄는 무언가 특별한 매력이 있다. 도시 안에서 기술은 인류의 욕망을 설계한다. 하늘로 치솟는 인류의 욕망, 고층 아파트다. 이제 고층 아파트를 찾는 것은 흔한 일이 됐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그것을 좇는 것은 누군가의 꿈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 강남 첫 고층ㆍ고급 아파트
한반도 중심부 서울. 그곳에서도 한강을 낀 인구 약 55만7000명의 강남구. 흔히 우리는 강남이 우리나라에서도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고층 아파트가 처음 탄생한 것은 강남이 아니었다. 1971년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최고 13층이었고 1975년 준공된 용산 서빙고아파트는 15층에 달했다.

그런데 고층의 상징이 왜 하필 강남이 됐을까. 여기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들이 있다. 1970년대 들어 빠른 경제 개발과 산업화에 따라 서울의 인구 집중 현상이 심화하면서 주택난이 악화하자 정부가 1972년 꺼내든 ‘주택 건설 10개년 계획’이 대표적이다. 1981년까지 10년에 걸쳐 주택 250만가구를 공급해 당시 50%를 밑돌던 도시의 주택 보급률을 90% 가까이 끌어올린단 복안이었다.

정부는 공동주택의 고층화로 토지 이용률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마련했다. 여기서 정부가 참고한 것이 이맘때 입주하기 시작한 시범아파트와 서빙고아파트 등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형태였다. 이들 아파트 시공에 참여한 건설사는 현대건설로, 서빙고아파트는 이 회사가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자체 주택 사업이었다.

강남 지역은 이러한 정책의 실험실이었다. 정부가 1960년대 중반 수립한 ‘영동(現 강남 일대) 개발 계획’에 따라 1972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 1호로 지정하면서 압구정동 등이 아파트 지구로 설정됐고, 주택 건설 계획과 맞물려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정부의 교과서 역할을 했던 현대건설은 이 때(1975년)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수행하며 장비를 보관할 용도로 확보하고 있던 대규모 압구정동 일대 토지에서 아파트 건설에 착수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압구정 현대)가 그곳이다.

당시 강남에선 가장 높은 최고 15층, 한강변 모래밭에 불과했던 강남 고층 아파트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물 한 방울에 전기마저 끌어올 데 없는 황량하기 짝이 없던 ‘과수원 옆 황무지’가 현대적이면서 고급 주거 단지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신호탄이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 신현대아파트’. /사진:이종무 기자 jmlee@

◇ 교통 마비 시킨 견본주택
압구정 현대는 6000가구가 넘는 대단지로 설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층이자 대단지 아파트였다. 특히 압구정 현대는 당대의 신기술과 신공법을 집약한 건축기술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전용 면적 140㎡ 이상 초대형 주택이 선을 보였다.

그만큼 분양가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분양한 전용 141㎡ 기준 1200만원이었다. 1980년 7급 공무원 연봉이 9만원 수준이던 점을 감안하면 ‘초럭셔리’ 아파트였던 셈이다. 서민 주거 형태로 여겨지던 공동주택(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은 발단이 됐다.

14차까지 공급한 압구정 현대는 차수를 거듭할수록 견본주택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남 개발로 여러 건설업체가 주변에 경쟁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가운데 주변 아파트보다 높은 가격으로 분양했음에도 견본주택 문을 열 때면 일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압구정 현대가 선풍적 인기를 끌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건축미와 주거 환경의 조화가 꼽힌다. 오래 봐도 싫증이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외형과 황토색 색상, 주택 마당을 연상시키는 발코니 구조 등 우리의 전통과 한국인의 생활방식을 최대한 고려한 설계가 적용됐다. 이는 대중의 아파트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1969년 한남대교 준공과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강남 개발이 순차적으로 맞물리면서 열악했던 교통 환경이 크게 개선했고, 정부가 강북 도심 고밀화를 막기 위해 경기고, 휘문고, 숙명여고 등 전통 명문고를 대거 인근으로 이전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한 가정들이 압구정 현대 등 일대로 모여들었다.

압구정 현대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분양 스캔들이었다. 1978년 사원용으로 지은 이 아파트 중 약 600가구를 정부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 유명 연예인 등에게 주변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특혜 공급한 사실이 전국을 발칵 뒤집으면서다. 사회적 물의를 빚었지만 도리어 신흥 재벌과 전문직 종사자 등 신규 부유층, 해외 유학파가 몰려들었고 중산층까지 강남으로 향하는, 소위 강남 신드롬이 형성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강북에 거주했던 서울 거주 오피니언 리더의 절반 가까이(약 40%)가 불과 10여년 만인 1980년대 후반까지 압구정동을 위시한 강남 지역으로 이사했다는 통계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 명품 거리의 시초로 볼 수 있는 로데오거리가 조성된 것도, 오렌지족이라는 신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압구정동’과 ‘현대’라는 이름이 선망의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가 된 배경이다.

이종무 기자 j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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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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