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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 인용을 선고한 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일대에서 탄핵에 찬성한 시민들이 헌재의 파면 선고에 환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대한경제=강성규 기자] 12ㆍ3 비상계엄 이후 122일, 국회 탄핵소추 이후 111일만에 끝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정국은 그동안 수많은 변곡점을 거치면서 우리 국민은 물론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3일 오후 10시25분쯤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전국 범위의 계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ㆍ26 사태 이후 45년 만이었다.
이어 오후 11시를 기해 ‘포고령 1호’가 발동되고 곧바로 군인들이 국회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계엄 선포 직후부터 주저없이 국회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이 군인들을 막아섰다.
그사이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원들은 국회 담과 철문을 넘어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들었으며, 4일 오전 0시47분 본회의를 열어 오전 1시2분 재석 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의결 이후에도 한동안 긴장감이 흐르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이 오전 4시27분쯤 해제를 선언하면서 계엄 정국은 반나절도 가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특히 이때 표출된 ‘시민의 힘’은 헌재가 탄핵 선고에서도 이례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이번 정국은 물론 헌정사에도 길이남을 결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전광석화 같았던 계엄 해제와는 달리, 이후 국회는 예상 밖 교착을 거듭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을 중심으로 12월7일 탄핵소추안 의결을 시도했지만 국민의힘이 집단 보이콧을 하며 의결 정족수인 200석을 채우지 못해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됐다. 일주일 뒤인 14일 야권은 탄핵을 다시 상정했으며, 여당 ‘소신파’의 합류로 찬성 204표ㆍ반대 85표로 가까스로 가결됐다.
이후에도 곡절은 계속됐다. 국민의힘이 국회 선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 임명에 반대하고 나섰고 한덕수 대행 겸 국무총리 역시 주저하면서 재판관 ‘6인 체제’가 지속됐다.
결국 한 대행 탄핵소추 이후 공을 넘겨받은 최상목 대행 겸 부총리가 12월31일 정계선ㆍ조한창 2명의 재판관을 임명하며 헌재는 8인 체제로 탄핵 심판 절차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수사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검찰과 경찰로부터 수사 권한을 넘겨받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1월3일 체포영장 집행에 나섰지만 경호처의 저항으로 5시간30분 만에 철수했다. 이후 1월15일 2차 집행에서 경찰과의 합동 작전을 펼쳐 윤 전 대통령 신병 확보에 성공했다.
서울 서부지법은 같은 달 19일 공수처가 청구한 윤 전 대통령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때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과 극우 세력들이 법원 내부에 침입해 폭력사태를 일으킨 ‘서부지법 폭동’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기며, 탄핵 찬성 여론이 더욱 커지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이다.
반전은 또 일어났다. 3월7일 서울중앙지법이 윤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절차상 문제 제기를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속도전’을 펼치던 헌재에도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헌재는 2월25일 탄핵심판 변론절차를 모두 마무리했다. 그런데 4월 초까지 한달 이상 장고를 지속했다.
이런 가운데 탄핵 심판과 맞물려 정국 중대 변수로 여겨졌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3월26일 공직선거법 2심 선고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정국은 또 한 번 요동쳤다.
여야와 탄핵 찬반 세력 간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탄핵 인용 전망 여론은 불안에 빠졌고, ‘4대 4’, ‘5대 3’ 기각ㆍ각하를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헌재는 4일 선고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윤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윤 전 대통령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강하게 질타한 결정문에서 드러나듯, 그간의 ‘장고’는 국민분열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끌기 위한 헌재의 고심이 그만큼 깊었다는 방증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강성규 기자 g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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