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관계 잇는 매개체
기능ㆍ위계 넘는 유기적 구조 중시
사용자의 ‘선택적 경로’ 가능해야
건축, 해석에 따라 변화하는 틀
사용자 따라 표정ㆍ풍경도 달라져
도시와 자연 연결성 유지가 중요
전통적 사고 스민 韓 건축 인상적
도시 곳곳에 ‘시간의 결’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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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계 최고 영예로 손꼽히는 △프리츠커상(2010년)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 로열 골드메달(2025년) 등 수상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여성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가 최근 서울 동대문의 한 호텔에서 <대한경제>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 안윤수기자 ays77@ |
[대한경제=전동훈 기자] 높은 하늘과 부드러운 햇살이 어우러진 5월의 아침, 동대문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로비에 잔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025 여성건축가협회 기획전’ 강연을 위해 방한한 일본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Sejima Kazuyo)는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이내 건축 철학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표정에는 차분한 진지함이 더해졌다.
세지마는 이날 〈대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다”며 “그 안에서 공존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설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원 같은 건축’이라는 지향은 건축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며 “장소와 시대에 따라 구체화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공간이 관계를 잇는 구조여야 한다는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지마가 말하는 ‘공원 같은 건축’은 특정 기능이나 위계에서 벗어난 유기적이고 열린 구조다. 그의 손을 거친 공간에서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머문다. 정해진 동선이 아니라, 사용자가 직접 경로를 선택하며 자유롭게 공간을 체험한다.
세지마는 “어느 방향에서든 접근할 수 있고, 안에서도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어야 한다”며 공원 같은 건축의 실현 조건으로 △회유 가능한 동선 △다방향에서 유입되는 자연광 △개방된 출입 구조 등을 꼽았다.
세지마는 건축을 ‘움직이지 않는 구조물’이 아닌 ‘사용자의 해석에 따라 변화하는 틀’로 본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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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전경. / 사진=SANAA 제공. |
그는 “건축은 물리적으로 고정돼 있지만, 사용자의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과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며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완공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롭게 쓰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완결된 형태를 넘어 해석이 가능하고, 시간이 흐르며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건축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설계 방식 역시 감각 중심이다. 세지마는 작업에 앞서 현장을 찾아 대상지가 도시 안에서 어떤 위치와 성격을 지니는지 파악하고, 도면에 앞서 모형을 만든다. 이 모형 위에 다양한 형태와 규모를 적용해보며 공간 구성을 검토해 나간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세지마는 “모형은 생각을 형태로 옮기기에 가장 직관적인 방식”이라며 “모형과 도면을 오가며 생각을 다듬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부연했다.
건축물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방식 또한 세지마의 스타일로 통한다.
복잡한 건축 요소들을 정리해 각자의 시선으로 공간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세지마의 태도는 ‘경계’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이어진다.
세지마는 “건축은 본래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도시나 자연과 단절되어서는 안된다”며 “경계를 없애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부드럽게 연결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장소 고유의 특성과 재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고 밝혔다. 그는 “예전에는 빛과 투명성과 같은 개념적 요소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특정 장소의 재료나 기술, 문화에 대한 이해를 설계 과정에 적극 반영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건축에 도입되는 흐름에 대해 세지마는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이 필요한 건축도 있겠지만, 모두 그런 방식으로만 지어질 수는 없다”며 “사용자, 설계자, 시공자가 함께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건축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도시와 건축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인상을 전했다.
그는 “지형이 입체적이고 도시 구성도 복잡하지만, 그 안에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고 평했다. 도시 곳곳에서 시간의 결이 드러나는 풍경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징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세지마는 건축을 ‘시대의 기록’이라 칭하며 상상력과 공간에 대한 열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건축은 우리가 어떤 공간을 원했고, 무엇을 꿈꿨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남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빠르게 답을 찾기보다, 인내심을 갖고 자신만의 생각을 지켜나가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전동훈 기자 j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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