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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창] 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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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4-14 06:00:28   폰트크기 변경      

  가뜩이나 코로나19 사태로 한없이 심란한데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수가 생긴 것이다. 살던 아파트가 30년도 훨씬 지났으니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머리 위에서 물이 주룩주룩 새는 것은 실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부랴부랴 대야를 받쳐 물을 받고  침대 위에 비닐을 덮고 법석을 부렸다. 물론 위층에 연락하고 근처의 인테리어 가게 사장이 달려오곤 했다. 가게 사장은 누수구멍만 찾으면 쉽게 고칠 수 있다, 다짐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그동안 지나온 삶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되었다. 왜 남들처럼 진작 이사를 가지 않았을까? 86 아시안게임으로 온 나라가 들떠 있을 때 준공된 아파트였고 난생 처음 전세를 면하고 입주했었다. 그때부터 별 탈 없이 쭉 살아 왔다. 함께 입주했던 다정한 이웃들이 죄다 어디론가 떠나갔지만 미련하게 계속 한 자리를 고집한 셈이다. 아파트 뒤에 산책하기 좋은 산이 있고 주면 환경도 공기가 깨끗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만일 누수 같은 일만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불만 없이 살아갈 것이다.


  이때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우리 머릿속에도 누수가 생긴다면? 그런데 그때 새는 것이 물이 아니라 시라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하는 상상이었다. 계속 그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눈앞의 누수사건이 점차 희미하게 멀어지고 마침내 ‘漏詩’라는 기막힌 시 제목이 떠올랐다. 워낙 주제가 선명하고 소재 또한 뚜렷한데다 마음에 꼭 드는 제목까지 떠올라 시는 어렵지 않게 써질 것 같았다. 우리가 어떤 사태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천장이 찢어지고 물이 떨어지는 끔찍한 누수를 경험할지, 딱딱한 일상에 얽매인 희망 없는 우리의 삶에 균열을 내는 빛나는 시 구절을 만나게 될지는 각자가 선택한 몫일 것이다.



황경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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