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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눈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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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22 07:00:13   폰트크기 변경      
 
 

  

 이른 아침, 집을 나서니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다. 건물도 나무도 자동차도 흰옷을 껴입고 겨울잠에 빠진 듯 미동이 없다. 바람조차도 늦잠에 들었는지 도시가 고요하다. 요즘 들어 보기 드문 풍경이다.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미끄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며 걷는다. 출근길이라 바쁜 마음도 잠시 접어둔다. 눈 위를 걷고 싶어서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숫눈은 낭만과 추억이라는 단어를 소환한다. 차도 사람도 뜸한 시간, 자전거 바퀴와 내 발자국만이 하얀 눈 위에 길을 낸다. 눈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길은 어느덧 과거의 한 지점에 가 닿는다.

 

  어렸을 적 유난히 아침이 고요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눈이 쌓여 있었다. 창호지가 하얀빛으로 물들어 갈 즈음 방문을 열고 바라본 산촌은 동화 나라였다. 온 마을이 둥그런 구름 속에 묻혀 있는 듯 몽환적이고 사색적이었다. 모든 걸 무념무상으로 이끌게 하던 신비의 세계였다. 앙상한 감나무는 하얀 머플러를 두른 채 한껏 뽐을 냈고 돌담을 덮은 눈(雪)의 눈빛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항아리 위에도, 절구통 위에도 소복하게 쌓인 눈은 바람의 결을 따라 허공에 몸을 던졌다.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순수의 빛깔은 시골의 아침을 한층 평화롭게 만들었다.

 

  눈은 산촌의 궁색한 살림뿐만 아니라 소음도 잠재워 버렸다. 뒷집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듯 찰나에 많은 것들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래서인가 세월이 지난 뒤에도 눈 오는 아침은 어김없이 소녀 시절 동화를 이끌고 온다.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를 생각하며 사박사박 눈길을 걷다 보니 마음속 풍경들이 살아난다. 늘 쫓기듯 자전거로 휙휙 달렸던 익숙한 길이 새롭게 열리고, 뒤를 돌아보자 총총히 찍힌 발자국만이 조용히 우리를 따르고 있다.

 

장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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