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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쉽게 얻은 인생은 깡통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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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3-27 09:46:35   폰트크기 변경      

단골 미용실에 갔더니 새로 온 디자이너가 있었다. 키 크고 예쁘장한 얼굴이 마치 걸그룹 같았다. 친절함과 실력까지 갖추어 벌써 그녀를 찾는 손님이 늘고 있다며 원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다. 경력은 많은데 이십 중반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몇 살부터 일했느냐고 물었더니, ‘열일곱’이라고 대답했다.

이런저런 얘기하던 중에 그녀는 아직 학자금 대출이 남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지금은 하고 싶은 것들을 꾹 참고 있다고. “친구들도 취업해서 학자금 대출 갚고 있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우린 이미 빚쟁이들이었어요.” 나는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 말 대신 훌륭하고 대견하다고 말해주었다. “멋진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멋지지만요.” 진심이었다.

부모덕에 학비나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하고, 최소한의 고생도 없이 꿈을 이룬 청년들보다 그녀의 인생이 훨씬 빛나 보였다. 경력도 없는 대학 신입생이 큐레이터가 되고, 돈만 있으면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기막힌 세상이다. 타이틀 하나 따면 외국으로 유학 가는 게 그들의 수순. 학자금을 갚아야 하는 청년들은 꿈도 꿀 수 없는데, 그 철없는 부류들은 부모를 숨기지도 않는다. 또래들의 박탈감이나 분노가 훗날 어떤 세상을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쉽게 이루고 공짜로 얻은 인생은 가공된 참치 같은 것이다. 예술은 더 그렇다. 신선하지도 않고 맛도 없는 깡통 속의 음식 같은 것.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지가 너무 많아 배부른 사람들은 제발 예술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땀으로 점철된 바닥에 기름 투척은 하지 말아야지.

염색이 끝난 후 그녀에게 말했다. “외모가 연예인인데, 그쪽으로 도전해 보세요.” 표정을 보니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닌 듯했다. 맑게 미소 짓던 그녀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거 하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이 일을 못 하잖아요.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학자금도 이제 다 갚아가요!” 순간 내 얼굴은 붉어졌고, 그녀는 끝까지 빛나고 있었다.

이은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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