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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의 창] 어디로 가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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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05 05:00:27   폰트크기 변경      

도시전철의 새벽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달린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가방을 안고 조는 학생. 셀폰과 한 몸이 된 청년. 빈 수레를 끌고 새벽시장에 가는 어르신. 당당하게 거울을 들고 다 못한 화장을 마무리하는 여인. 어쩌면 저들은 끼니도 못 챙기고 일터로 달려가거나 밤새 일에 지친 채 귀가하는지도 모른다.

맞은 편 경로석에 한 남자가 던져진 채 실려 간다. 마분지처럼 구겨진 몸이 어둑하다. 관절을 다 꺾고 엎드린 마리오네뜨 인형 같다. 깊이 잠들었는지 주변의 어수선함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 밤새 야근을 하고 귀가하는 것 같진 않다. 출근하는 그림은 더더욱 아니다. 다리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여 있는 소주병은 이미 뚜껑이 없다.

바닥에 조금 남은 술이 그를 붙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소주병이 뿌리 없는 풀처럼 흔들린다. 누구와 함께 나눈 밤이 아니라 홀로 자신에게 쏟아 부었겠다. 부어라, 마셔라, 세상과 대적했을까. 돌아눕다 병이 떨어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지만 그는 내가 환승역에 내릴 때까지 어떤 움직임도 없다.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였을 엄마를 잃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조금씩 꿈을 잃어가던 아이. 퇴근하는 나를 잡고 올려다보던 그 눈빛. 끝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술을 들이붓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격리된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그 아이만 생각하면 나는 늘 가슴이 아프다.

“술맛을 알면 시의 맛도 더 좋아질 텐데.” 동인을 하던 K시인은 모임자리에서 맹물로 건배하는 내게 술의 부신 역할과 효능을 얘기했다. 맹물을 마시고도 얼마든지 취할 수도, 깰 수도, 밤새 시와 사람과 세상을 논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를까. 일꾼들 새참을 이고 들판으로 가는 엄마 따라 사철 농주 주전자를 양손에 들고 다니며 자란 내가 술맛을 모를 리 있겠는가.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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