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선개통기념비(문화유산포털) |
영주~철암 86.4km 경제동맥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승부역 역내 북 언덕에는 돌로 쌓은 사각형 모양의 탑이 있다. 탑 중앙에는 한자로 영암선 개통 기념비라고 씌여 있다.
영암선은 1949년 4월 착공해 전쟁통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55년 12월 준공한 철도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노선이다. 1963년 5월 철암선, 황지본선, 동해북부선 등과 함께 영동선에 편입돼 영동선의 일부가 됐다.
영암선이 경북 영주에서 강원 태백 철암까지 86.4㎞구간으로 건설됐으니 지금 영동선 이 구간이 과거 영암선이다.
승부역 전경(사진 한국철도공사) |
영암선 개통 기념비는 2013년 2월 국가등록문화재 540호로 지정됐다. 문구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이니 그럴만 하다. 여기에 영암선 자체가 갖는 의미도 문화재 지정 사유로 빠지지 않는다. 영암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우리 기술로 건설한 최초의 철도다. 요즘말로 하면 최초 국책 SOC사업이다.
1948년 8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3년의 미군정을 거친 후다.
정부 수립후 처음 맞는 새해인 1949년 1월1일 부흥부는 경제 부흥에 수반한 산업개발 철도 및 철도망 건설계획을 수립했다. 여기에는 영암선을 비롯해 영월선(영월∼제천 38.1㎞)과 함백선(제천∼함백 60.7㎞)도 포함됐다.
이 가운데 영암선이 그해 4월8일 가장 먼저 착공됐고 5월3일에는 영월선과 함백선도 공사에 들어갔다.
정부 수립후 첫 국책 S0C사업으로 철도가 선택된 것은 석탄때문이었다. 1948년 5월14일 정오를 기해 북한은 남한의 단독 선거를 트집잡아 송전을 중단했다. 남한의 전력사정은 최악의 상황이 됐고 정부는 태백준령 삼척일대에 매장된 석탄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탄전개발보다 더 시급한 것이 수송망이었다. 일제 강점기 건설된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공급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실정이었다. 삼척과 영월을 잇는 수송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가 건설한 도계∼묵호∼철암 노선의 철도로 석탄을 운반해 묵호항에 하역하면 이를 다시 배에 실어 인천으로 옮긴 후 또다시 철도를 이용해 영월로 수송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백준령의 산업철도 건설은 필연적인 과제였다.
영암선 건설공사는 모두 25개 공구로 분할돼 대림산업, 중앙산업 등 25개 건설사에게 시공이 맡겨졌다. 정부 수립후 나온 최초의 대형공사인 만큼 당시 건설업계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영암선 건설을 맡은 건설사들은 이것 하나만으로 일류 업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공업체들은 착공식을 거행한후 서울 용산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영암선 시공업자 축구대회’를 열어 자축했다.
이런 분위기와 달리 주변국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미 극동사령부는 “건설기술이 미약하고 자금도 없이 원조에 의존하는 8개월 신생국가가 수행하기에는 무리다”라고 충고했고 일본 가고시마 방송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업을 시작했다”고 비아냥거렸다.
철도건설공사가 한창이다(사진 한국철도공사 ) |
그럼에도 초기공사는 순조로왔다. 착공 6개월만에 제천∼송학구간 9.8㎞를 개통했고 다음해인 1950년 3월1일에는 아주토건이 시공을 맡은 영주∼내성구간 14.1㎞를 준공했다. 역경은 그해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으로 공사는 전면 중단됐고 3년여가 지난 1953년 9월28일 공사가 재개됐다.
오랜 공사중단으로 시공사들의 피해도 컸다. 11공구와 12공구를 맡은 대림산업의 1950년도 결산보고서는 ‘전쟁전 11공구 투자액 6900여만원, 12공구 투자액 3800여만원이었던 것이 자재 일체의 행방불명 등으로 11공구와 12공구 합해 2799만9355원에 불과’라고 기록돼 있다.
공사는 재개됐지만 여건은 최악이었다. 남은 구간의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대인데다 전쟁후 인근의 태백산과 월암산등지에서 공비까지 출몰하는 상황에 처했다.
대림산업 현장의 한 직원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인가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하늘을 찌를 듯한 빽빽한 수풀과 가파롭기만한 험한 산, 그리고 손바닥만큼 뚫린 하늘뿐인 현장은 저녁 7시만 되면 영주에서 현장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날이 저물면 공비들이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들려오는 소문은 어디어디에서 인명피해를 당했다는 얘기뿐이었다. 현장이라고 무사할리는 없었다. 밤만 돌어오면 어디에 숨어서 자야할지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일과였다. 만약을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영주~춘양구간 개통식(사진 한국철도공사) |
영암선은 공사를 재개한지 2년3개월만인 1955년 12월30일 준공했다. 다음날 태백준령의 무연탄과 시멘트를 가득 실은 열차가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영암선은 주요 구조물로 교량 55곳 2843m, 터널 33곳 8312m가 들어섰고 공사비는 원화 5억3420만원과 외화 453만1000달러가 투입됐다. 연 486만291명의 인력이 동원됐고 레일 7300톤, 침목 17만8740정, 시멘트 3만3430톤, 강재 3670톤, 쇄석기ㆍ기중기ㆍ불도저ㆍ검프레서 등 장비 23종 145대가 가동됐다.
영암선에 이어 착공한 영월선은 1955년 12월30일, 함백선은 1957년 3월9일 준공되면서 정부수립후 착수한 3대 철도사업이 착공 7년11개월만에 모두 마무리됐다.
영암선 개통 기념비가 봉화군 승부역내에 세워진 것은 이 지점이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가장 큰 난공사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영암선 공사의 첫삽은 경상북도 영주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봉화군을 거치면서 공사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그래서 공사는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에서 다시 시작됐다. 그런데 봉화군 석포면을 거치면서 또다시 작업이 멈추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일을 하는 인부들이 난색을 보였기 때문다. 이렇게 양쪽 끝에서 시작해 멈추게 된 지점이 바로 승부역이었다.
영암선은 한국전쟁 전후 혼란한 시대를 맞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됐다. 힘들고 어려운 공사이다보니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고된 작업으로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인부들을 애도하며 영암선 개통을 기념하는 글자를 썼고 기념비는 승부역에 세워졌다.
광복후 국내 철도연장은 총 6362㎞였다. 남한이 2642㎞이고 북한이 3720㎞였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2021년 철도연장은 4189㎞다. 한국철도는 전철화율을 감안하지 않은 총연장만으로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뤘다. 그 처음이 영암선이다.<참고자료:한국건설통사(건협ㆍ건산연) 대림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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