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이 무너지면 어떤 계획도 의미가 없다’.
최근 취재 현장에서 만난 건설업계 관계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건설사업관리용역 수주금액 상위 사업자 간 상호 공동도급 제한 제도’를 원칙이 무너진 사례로 지목했다.
LH는 지난 2018년 입찰 참여 사업자 간 과다 경쟁 및 낙찰 편중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내부 방침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LH가 최근 집행한 ‘부산문현2 민간공동 주거환경개선사업 시공단계 감독권한대행 등 건설사업관리용역’에서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컨소시엄 편법 구성 사례가 발생했다.
지난해 말 발주된 이번 입찰에서는 ‘2022년도 상호 공동도급 제한 사업자’ 10곳에 해당하는 건축사사무소광장(이하 광장)이 대성종합건축사사무소와 진전기엔지니어링의 계열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이다.
광장은 이번 입찰에서 서영티이씨, 대성종합기술단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대성종합기술단은 대성종합건축사사무소의, 서영티이씨는 진전기엔지니어링의 계열사에 해당한다. 대성종합건축사사무소와 진전기엔지니어링 모두 광장과 함께 상호 공동도급을 제한받는 사업자들로 LH가 이 제도를 시행한 이래 이런 사례는 처음이다.
그 동안은 부동산 경기 호황으로 일감이 많아서였는지 제도 도입 취지에 따라 상호 공동도급을 제한받는 사업자들은 이를 자율적으로 준수해왔다.
하지만 지난 해 ‘레고랜드’ 사태로 민간 건축시장이 급랭하면서 주택법에 따른 감리 물량이 급감하고, 공공 부문에서도 감리 및 건설사업관리용역이 줄어 일감 확보가 어려워진 탓일까? 결국 ‘수주금액 기준 상위업체 사업자’ 간에만 공동도급을 제한하는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꼼수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이번 입찰을 재입찰에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것이 설계가격이 158억원에 달하는 이 용역은 올해 LH의 건설사업관리용역 중 최대어로 손꼽히는 데다 올해 민간과 공공 분야의 건설사업관리용역 발주가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LH는 현행 제도가 이 같이 계열사를 동원하는 경우는 규정하지 않는다고 판단, 광장 컨소시엄과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향후 입찰 과정의 공정 경쟁을 도모하고자 제한 기준을 개선해 이달부터 사전규격 공고를 내는 용역에 적용하기로 했다.
현행 설계공모와 마찬가지로 기업집단을 포함해 수주금액 상위업체 간 공동도급은 물론 지배회사와 계열사의 공동도급도 제한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피해갈 꼼수도 있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해당 회사 발행 주식을 30% 이상 소유하면 기업집단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보유 주식을 30% 미만으로 줄이면 기업집단에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법적 근거가 없는 이 제도는 시장 개입으로 자본주의 원칙인 ‘자율 시장경쟁’에 어긋난다.
발주처가 동반 성장과 상생 등 아무리 좋은 취지와 명분을 내세워도 원칙이 무너진 시장은 규제로 인식해 자율보다는 편법과 꼼수가 늘어 이를 지키려면 규제를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원칙이 무너진 가운데 자율과 규제의 적절한 접점을 찾는 제도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채희찬 기자 c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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