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폭격에 완파안되고 경비절감 이유에 공감…현대 손 들어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1970년 소양강댐 건설현장 전경 . 사진 국가기록원 |
1967년 2월23일 건설부가 마련한 입찰장에 현대건설을 포함한 4개사가 자리했다. 소양강댐 1차연도 공사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건설부는 5개년 계획 사업으로 총 66억7000만원을 투입해 소양강댐을 건설키로 하고 현대건설, 대림산업, 대한전척, 삼부토건, 동아건설, 평화건업, 경남기업 등 7개사를 대상으로 지명경쟁입찰에 부쳤다. 1차연도 공사는 댐축조에 따른 가배수로 시설일부와 공업용 동력 및 통신시설, 가건설사무소 신축과 진입도로 축조 등으로 사업비는 9500만원이다. 입찰에는 3개사가 빠진 4개사가 참여했다. 현대건설이 사업비 대비 77.3%인 7350만원을 투찰해 낙찰사로 선정됐다.
소양강댐이 완공된 이후인 1978년 수문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1960년대 2대 토목공사의 하나로 꼽힌다. 규모뿐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우리나라 댐 건설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공사이기 때문이다. 소양강댐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진 1950년대부터 건설이 구상됐다. 당시에는 수력발전 단일목적댐으로 검토됐으나 1960년에 이르러 사회적인 여건변화로 다목적댐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1960년 Smith Hinchman & Grill기술회사가 현지조사를 거쳐 108m의 콘크리트 댐을 제안했다. 1962년 11월에는 우리 건설부가 일본공영과 기술조사 및 설계용역을 체결했다. 일본공영은 세계적으로 댐 기술에 관해서는 권위를 인정받던 회사였다. 하지만 정부의 재원부족과 국내 건설업체들의 기술력 미숙으로 인해 공사는 착공되지 못했다. 공사는 1967년에 가서야 정부의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1967년 2월 소양강댐 제1차연도 건설공사 입찰이 집행됐다. 현대건설이 7350만원을 투찰해 낙찰사로 결정됐다. 이때도 댐의 방식은 일본공영의 기술조사 결과에 의한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다. 댐의 방식이 콘크리트 중력댐에서 사력댐으로 바뀐 것은 1968년 5월 건설부가 기본설계를 마치고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실시설계를 진행하려는 단계에서 이뤄졌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현장 주변에 널려있는 모래와 자갈을 이용해 사력댐을 만들자고 설계변경을 제안했다.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건설하기에는 당시 시멘트와 철근이 크게 부족해 자재변동이 극심한 데다 자재의 운반비용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사력댐으로 바꾸면 총공사비를 절감하고 공기도 1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현대건설의 설명이었다.
현대건설의 제안은 일본공영뿐만 아니라 우리 건설부와 수자원개발공사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건설 공사비 중 일부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충당되면서 기술용역을 맡은 일본공영은 기술부터 자재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간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 당시 국내 건설업체들은 기술 축적도가 낮아 건설부가 파견한 감독의 지시대로 작업을 하는 게 의례적인 일이었다. 아직도 청부업자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반전은 건설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현대건설의 대안을 보고하면서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사력댐이 폭격을 당해도 콘크리트 댐처럼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데다 경비도 적게 든다는 설명을 듣고 현대건설의 손을 들어줬다. 이렇게 해서 1968년 8월 소양강댐의 설계를 다시 사력댐으로 변경해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현대건설은 준비공사, 가배수로공사, 물막이 공사를 거쳐 본댐 공사에 들어갔다. 본댐 공사는 1969년 10월24일 기초굴착공사가 시작돼 1972년 11월10일 완공됐다. 여수로 공사는 1969년 10월 중순 상부저수지 굴착을 시작으로 45개월 만인 1973년 6월 말 전 공정이 끝났다. 발전소 건설은 하부공사, 건물공사, 옥외변전소 기초공사, 발전기기 설치공간 등으로 나뉘어 1970년 4월 중순 착공돼 1973년 11월 발전기가 설치되면서 마무리됐다.
2008년 5월 발간된 현대건설 60년사에는 소양강댐 건설에 기술주임으로 참여한 권오석씨의 회고가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 점보드릴을 설치하기 위해 온 기술자가 하는 말이 김포에 처음 내렸을 때는 서울이 국제도시로 발전하여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은 데에 놀랐으나 소양강댐 터널시공 방법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회고처럼 현대건설은 소양강댐 시공 당시 의욕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아 차관을 통해 들여온 장비를 대여받아 시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소양강댐 건설을 통해 기계화 시공경험을 터득했고 이때 양성된 수백명의 기술자는 현대조선소, 안동댐, 구미공단 등의 조성에 투입됐다.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업체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도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
1973년 소양강댐 현장 전경. 사진 국가기록원 |
다목적댐으로 건설된 소양강댐은 완공이 되기 전부터 다목적댐의 기능을 톡톡히 해냈다. 1972년 8월19일을 전후로 중부지방에 이틀간 집중적으로 비가 내렸다. 유례없는 강우량으로 사망ㆍ실종자만 200여명에 달한 일명 8ㆍ19 홍수다. 당시 사람들은 이 홍수가 1925년 을축년 수해 다음가는 것이라고들 했다. 그만큼 비의 양이 많았고 피해도 컸던 탓이다. 그럼에도 내린 비의 양에 비해 피해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평가됐다.
이런 평가가 나온 데는 당시 준공을 1년여 앞둔 소양강 다목적댐의 역할이 컸다. 8ㆍ19 홍수 당시 이미 123m의 댐이 완성된 상태로, 여기에 매초 7640톤씩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받아 1640톤씩 배수해 홍수가 조절된 것이다. 소양강댐이 매초에 저수되는 6100톤의 물을 그대로 흘려보냈더라면 한강수위는 60㎝가량 더 오른 11.84m에 이르러 범람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신문의 보도다.
소양강댐은 1973년 10월15일 준공됐다. 공사비는 대일청구권 자금인 외자 2165만달러를 포함해 총 265억원이 투입됐다. 1차연도 사업을 7350만원에 낙찰받은 현대건설은 이후 모든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수행했다. 입찰 때부터 신문들은 ‘건설부가 시행하는 각종 건설공사 중에 큼직큼직한 것은 정치적으로 입찰전에 시행업자가 결정된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낙찰사 내정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7개 지명업체 중 4개사만 참여한 것도 석연치 않다는 비판이었다. 이로 인해 공사기간 중 열린 국정감사에는 소양강댐이 단골메뉴로 올랐다. 야당은 수의계약문제부터 대일청구자금으로 받은 장비의 무상양여 등을 따졌다.
1968년 소양강댐 공사현장. 1000여명의 젊은이들이 국토건설단이라는 이름으로 끌려와 공사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
소양강댐은 체적이 960만㎡로, 신문들은 당시 3500만이던 전 국민 한사람이 흙 7가마씩을 져다 부은 양이라고 보도했다. 소양강댐 건설은 강줄기를 막고 그 흐름을 바꾸면서 산을 헐고 강을 메우는 난공사였다. 1000여명의 젊은이들이 국토건설단이라는 이름으로 끌려와 공사현장에 투입되기도 했고 37명의 인력이 발파작업 현장에서 또는 수몰작업장에서 생명을 잃었다. 소양강댐 양쪽에는 20m 높이의 준공기념탑과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건립돼 준공식과 함께 제막됐다.<참고:현대건설 60년사 대댐회지 37호 조선일보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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