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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라화랑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최초 발견자는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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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9-25 10:00:34   폰트크기 변경      

석당 최남주는 평생 이재(利財)와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오직 경주의 신라 문화유산 발굴과 보존에 사재를 털어 헌신하는 외길만을 걸어왔다.


석당 최남주의 만년에 고택을 방문하는 국내외 후학들이 놀라워하는 것이 있었다. 경주 신라 문화유산의 최고 발견자치고는 소장품이 고작 깨어진 토기들과 신라 와당 조각 몇 점, 그리고 자신의 성성한 백발이 전부였다.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장직에 있으면서 신라 유물들을 사장(私藏)해 스캔들을 일으킨 일본인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는 항상 후학들에게 말하기를 신라유물들을 사장하게 되면 사욕이 생겨서 문화유산 보존과 학문연구에 장애가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자신이 발견한 수많은 유물들을 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고 대학박물관에 기증해 후학들의 신라문화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제공했다. 그런데 오늘날 경주박물관에 방문해보면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는지 설명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그의 좌우명처럼 평생을 명리(名利)를 멀리했기 때문이었을까.

오사카긴타로가 주장하는 ‘임신서기석’ 발견 경위

일제강점기 1934~1935년은 조선인 석당 최남주에 의해 경주에서 신라 금석문 두 점이 연달아 발견된 해다. 그 발견은 6세기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세기적인 발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첫 번째 발견은 1934년 10월 31일 경주남산 식혜곡에서 발견한 신라남산신성비(新羅南山新城碑)다. 서기 591년 신라 진평왕 13년 신해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높이 91cm 넓이 44cm 자연석 화강암에 치석(治石)되어 고졸한 육조풍의 서체로 음각된 비석이다.


이 비가 만약 이렇게 크지 않고 작았다면 공동 발견자인 오사카긴타로(大坂金太郞 1877~1974, 경주박물관장 역임)에 의해 자기 개인소장으로 날조되어 일본으로 반출될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남산신성비 발견 보도는 당시 경성일보 1934년 11월 5일자(일어판)에 중간 톱기사로 제일 먼저 보도되었다. 그 후 오사카는 자신이 남산신성비를 발견했다는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하기 위해 『조선』 25(1934) 잡지에 남산신성비 발견 경위를 자신의 공적을 위주로 발표하였다. 한편 일본 식민지 관학파의 신라사 연구 대가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 조선총독부박물관장 역임)는 1935년 3월 ‘청구학총(靑邱學叢)’ 제19호에 ‘조선금석소담(朝鮮金石琑談)’이란 제목으로 남산신성비의 발견은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금석문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 논문에서 최초 발견자인 최남주가 조선인이란 이유로 아예 이름조차 빼고 오사카가 발견자로 기록되어 있다.


경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는 ‘신라화랑임신서기석’탁본.  최근 연구에서 제작 연대가 서기 552년 진흥왕 13년으로 밝혀졌다.
/사진: 매월다암 측 제공


일제강점기 오사카긴타로의 왜곡된 증언과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1904~1992, 경성제대 교수 역임)의 논문기록을 토대로한 ‘임신서기석’의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4년 5월4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인 오사카긴타로가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를 조사하던 중 오사카의 발에 문득 돌 하나가 걸려서 자세히 보니 냇돌(川石 길이 30cm)에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 내용이 계속해서 한일학자들 논문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임신서기석 발견자가 오사카 긴타로가 된 것이다. 만약 오사카가 1934년 ‘임신서기석’을 발견했다면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934년 어느 신문에서도 그의 발견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임신서기석’에 대한 어느 사학도의 기록

1959년 9월21일 중앙대학보에 당시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허웅(許熊)이란 사학도가 ‘화랑도유물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란 기고문을 통해 임신서기석의 최초 발견자는 최남주라고 발견 경위를 기고하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경주 사학자 석당 최남주 댁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화랑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중 특히 ‘화랑서기석(임신서기석)’ 이야기를 감명 깊게 새겼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돌(임신서기석)은 지금부터 24년 전 단기 4268년(1935년) 경주 금장리 석장사 한 부근에서 공사 중 출토되어 바로 최남주(崔南柱)씨의 손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35년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최남주의 증언이다. 이 부분이 오사카의 석장사 답사 중 발견하였다는 증언과는 틀리는 부분이다. 또한 석당 최남주는 분명히 1년 전에(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의 자체(字體)와 ‘임신서기석’이 같다고 밝히고 있어 발견 시기도 오사카 긴타로의 발견인 1934년과는 차이가 난다.”

1966년 석당 최남주의 고택에는 깨어진 토기 몇 점과 와당 조각들이 학습용으로 소장돼 있었다.  /사진: 매월다암 측 제공


석당 최남주는 소년 시절 경주의 대유학자 김계사(金桂史 김범부의 스승)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보성고보 시절에는 민족사학자이자 은사였던 황의돈 선생으로부터 고대 금석문 강독법을 배웠다. 오히려 오사카보다 금석문 해독실력이 뛰어났다. 다만 우리 문화재 수난사 연구가인 정규홍 선생의 지적처럼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는 보고서나 논문 발표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석당 최남주는 자신이 발견한 신라금석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다음은 석당의 ‘임신서기석’에 관한 회고담이다.


“1935년 봄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부근에서 농수로공사로 인해 신라시대 와당들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천수답 경사 언덕 맨 아래쪽에서 ‘남산신성비’처럼 생긴 작은 강돌(川石)이 최남주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앞면이 치석되어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란 글자체가 음각되어 있었다. 또한 중간에 3년이란 맹세문장이 쓰여있어 직감적으로 작년에 발견한 ‘남산신성비’ 문장체제와 같다고 확신했다. 이튿날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니 관장인 오사카가 첫눈에 가짜라고 단정하고 유물 수장고에 방치해버렸다. 망국의 한이었다.”

1935년 12월 18일 스에마츠 야스카츠가 경주박물관 방문 시 이 비석의 가치를 어느 학자보다 먼저 알아보고 1936년 『경성제대 사학지 제10』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란 논문을 통해 발견자가 오사카 긴타로라고 소개하였다. 그 후 오사카는 ‘임신서기석’을 자기 개인 소장품으로 둔갑시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박물관장실에 보물처럼 보관하였다.

오사카의 지욕(知欲)과 사욕(私欲)을 용서하다

오사카 긴타로는 8월 15일 광복 이후 9월에 ‘임신서기석’을 못 챙기고 자기 집에 보관 중인 다른 신라유물들만 챙겨 도망치다시피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1960년대 이후 오사카는 석당 최남주에게 편지로 ‘임신서기석’의 안부를 물어왔다. 석당 최남주는 정부 수립 후 오사카의 이러한 파렴치한 만행을 밝힐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에서 오사카와 애(愛)와 증(憎)이 교차한 최남주는 죽음을 앞둔 일 년 전부터 노구를 이끌고 신축 개관한 경주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 중인 ‘임신서기석’을 자주 찾았다. 그리고 오사카의 지욕과 사욕이 빚어낸 ‘임신서기석’에 대한 얼룩진 과거를 떠올리고 온전히 지키지 못한 다른 유물들을 기억하며 그 아픔을 매만지고는 했다. 또한 동행자에게 말하기를 이 귀중한 유물만큼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고 우리 청소년들에게 화랑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는 것에 평생 뿌듯한 긍지를 느낀다고 하였다. 석당 최남주는 1980년 서방정토로 떠나고 만다. 어쩌면 그곳에서 임신년에 맹세한 신라의 두 화랑과 조우했을지도 모른다.


현암 최정간 (매월다암 원장, 차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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