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이승윤 기자]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낙마 사태에 따른 여진이 법조계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대법원장 공석 장기화가 불가피해지면서 대법원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당장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상고심 사건을 다루는 전원합의체 심리가 멈춰섰고, 내년 1월1일 임기를 마치는 안철상ㆍ민유숙 대법관의 후임 제청 절차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는 사법부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자체보다는 여야가 다른 정치 현안과 결부시켜 표결을 질질 끄는 과정에서 사법부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는 비판이 많다.
법원장 출신인 A변호사는 “인사청문회가 끝났으면 당론이든, 의원 개개인의 찬반 입장이든 곧바로 표결에 들어갔어야 했다”며 “대법원장 자리가 한낱 정쟁 대상으로 추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여야는 서로 ‘네 탓 공방’만 이어가고 있다. 대법원장 없이 열린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여당은 대법원장 공석 사태의 책임을 야당 탓으로 돌렸고, 제1야당은 애초부터 부적절한 인사를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번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받아쳤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새 대법원장 후보는 물론,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의 후임까지 찾아야 하는 이중고에 빠져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 양대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과 헌재의 수장 자리가 동시에 비게 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법원장이든, 헌재소장이든 헌법에 따라 국회 임명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후보자 낙마 사태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확연히 다르다. 앞서 이른바 ‘2차 사법 파동’의 여파로 1988년 7월2일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을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틀 만에 이일규 전 대법관을 구원투수로 올렸다. 바로 다음날 새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현행 헌법 체제에서 임명된 대법원장 가운데 가장 높은 94.2%의 찬성률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금은 이런 ‘속전속결’이 불가능하다. 윤 대통령이 하루빨리 훌륭한 후보자를 지명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후보라도 그야말로 ‘후보를 찢어발기는’ 청문회가 두려워 적임자들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이 후보자 낙마 사태는 문재인 정부 시절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 낙마 사태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정권은 바뀌었는데 대통령실의 반응은 판박이다. 6년 전 청와대는 야당을 향해 “무책임의 극치,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판을 내놨고, 이번에도 대통령실은 “국민의 권리를 인질로 잡은 정치 투쟁”이라고 야당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질 뿐이다. 여야가 자기들 입맛에 맞는 판결에는 환호성을 보내다가 반대로 자기들에게 불리한 판결에는 야유를 보내며 사법부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악순환만 반복되고, 사법부의 독립이나 정치적 중립은 점점 더 요원해진다.
부디 정부ㆍ여당과 야당이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라는 뜻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옛말을 되새겨보길 바란다.
이승윤 기자 leesy@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