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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반 시게루와 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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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1-02 05:00:15   폰트크기 변경      
김태형 Team S 팀장

[대한경제=김태형 기자] ‘행동하는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ㆍ65)가 만든 종이주택을 보고 왔다. 재난으로 집을 잃은 이들을 위해 조립 및 해체, 재조립을 쉽게 만든 모듈형 재난주택이다.

김태형 Team S 팀장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전시된 종이집은 가로ㆍ세로ㆍ높이 3.6m 크기의 ‘기본형’과 모듈형 벽체ㆍ기둥을 추가해 공간을 키운 6m짜리 ‘연장형’ 등 2종류다. 기둥과 들보는 싸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강한 재활용 마분지 튜브(종이관ㆍPaper tube)를 썼고, 문짝과 창호, 벽지는 전통 한옥에서 따왔다. 온도 조절과 습기 흡수가 뛰어난 한지로 마감한 벽지ㆍ창호가 돋보였다. 집의 기초는 맥주상자에 모래주머니를 채워 구축했다. 모든 재료가 구하기 쉽고 가볍우면서 다루기 쉬워 숙련된 시공자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다.

반 시게루는 르완다 내전(1994년)을 시작으로 대지진이 발생한 일본 고베(1995년), 인도(2001년), 아이티(2010년), 튀르키예(1999ㆍ2023년) 등 세계 재난 현장을 찾아 종이집을 지었다. 뉴질랜드 강진으로 무너진 자리에 다시 세운 ‘종이 성당(Cardboard Cathedralㆍ2013)’은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올해 3월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난민을 위해 종이 튜브와 기둥ㆍ들보, 천을 이용해 하루만에 32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종이방’을 만들었다.

반 시게루의 작품은 유쾌하고 따뜻하다. 일본 도쿄 번화가인 시부야 한복판에 만든 ‘투명 화장실(2020)’이 대표적이다. 이 화장실은 외벽이 유리로 돼 있어 밖에서도 변기와 세면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이용객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면 순식간에 불투명벽으로 바뀐다. 공중 화장실은 어둡고 냄새나고 무섭다는 고정관념을 깨려는 발칙한 시도다.

그는 최근 ‘서울디자인 2023’ 컨퍼런스에 참가해 “디자인은 레크레이션(오락)이 아니다, 장식이 아니다”면서, “디자인은 문제해결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면 뇌(이성)와 연결되지만, 손으로 그리면 심장(마음)과 연결된다”며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세태를 경계했다.

한국에도 인도주의 건축에 평생을 바친 건축가가 있다. 반 시게루가 종이의 건축가라면, 한국의 정기용(1945∼2011)은 흙의 건축가다. 낮은 담, 풍경이 보이는 큰 창, 담쟁이 등이 정기용 건축의 특징이다. “건축가는 자연과 주민, 사회에 답하는 사회적 조절자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던 그는 목욕탕을 품은 면사무소, 등나무 운동장(무주공설운동장) 등 10여년간 전북 무주에 31개 공공건축물을 지어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순천 등 전국 6개 소도시에 지은 어린이를 위한 ‘기적의 도서관’도 그의 작품이다. 정기용은 서울 명륜동 다세대 셋집에 살다 대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는 ‘선진국=살기 좋은 나라’의 개념에 대해 “우리집보다 밖에 나가면 더 좋은 게 많은 사회”라고 정의했다. 반 시게루와 정기용처럼 ‘밖(공공 지대)’을 더 좋게 만든 구루 건축가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을 건축가를 고대한다.

김태형 기자 k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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